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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Apr 05. 2020

나에게 하는 말과 남에게 하는 말

내가 남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 나는 내게 어떤 말을 해 줬을까?

나는 늘 타인의 삶을 응원해왔다. 그의 삶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또한 그것이 스스로를 해치는 선택이 아니라면. 그게 끝이 불명확한 선택이든, 현실적인 선택이든, 또 가던 길을 돌아 다른 길을 가는 선택이든. 그게 상대의 최선이라면 나는 늘 그 선택을 응원하는 역할을 택했다. 그게 누구라도, 그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은 없음을 알기에. 노력 끝에 선택한 결과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렇게 지금 가는 방향이 어디든, 결국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스스로에게 맞는 끝에 다다를 것임을 믿기에.

  

그 응원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건 나였다.


3년 전 한국어도, 영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외국에 나와도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뭔지 모르던 나였는데 어디에 있어도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을 만나 가족을 꾸리기로 결심하면서. ‘언어를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알바라도 하면서 내 용돈 정도는 벌며 살아갈 수 있겠지’ 라며 어떻게든 해낼 거란 믿음으로 왔지만 역시나 현실의 ‘어떻게든’은 머릿속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한국에선 매일 사람을 만나는 게 일이었는데 이곳에선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웃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사람을 만나는 게 고역이 됐고, 울며 불며 언어를 공부해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돼도 이미 모국어에  2,3개 국어까지 유창한 현지인이 널린 마당에 굳이 일상생활 회화 정도를 구사하는 나를 뽑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1년이 지나자 그렇게 모아 온 돈도 떨어지고,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스스로 돈을 벌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돈을 벌지 못하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왔는데 정작 그에게 짐이 되는 게 힘이 들었다. 자존감은 낮아지고, 어떻게든 해낼 거란 자신감도 사라졌으며, 대신 무기력과 우울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헤어 나오기 힘든 우울 속에서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멸시하고,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매일 스스로를 평가하고 학대했다. ‘왜 계획 세운 거 다 못했어? 왜 아직도 이것도 못  알아들어? 왜 부족한 줄 알면서 노력을 더 안 해? 왜 이력서 돌리러 안 갔어? 왜 네가 부족한 걸 괜히 다른 사람한테 화내?’ 매일 현실의 압박에서 도망치는 것도 나였고, 그런 날 몰아세우고 다그치고 혼내는 것도 나였다. 그런 시간이 몇 개월 반복되자 우울은 일상이 됐고 의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내적 폭언도 일상이 됐다.  나는 마치 물 잔에 물을 가득 담아 들고 다니는 사람처럼 마음에 우울을 가득 채우고 우울이 조금씩 흘러넘칠 때마다 나를 채찍질하고 공격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해줬을까?’  만약 내 친구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해줬겠지.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1년 만에 언어를 배우고 살아간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그 노력도 대단하지만 그곳에 가기로 결심하고, 결심을 실행하고, 그 모든 어려움을 마주하고 버텨내는 네 용기가 정말 대단해.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너라면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해낼 걸 믿어. 늘 그래 왔듯이. 아이가 말을 하고 걸음을 걷는 데 시간이 걸리듯이 너도 새로운 세상에서 첫걸음을 떼기 위해 시간 이 필요할 뿐이야. 너는 아주 잘하고 있고, 지금은 과정일 뿐이야.”      

 

남을 믿어주던 난데, 늘 좋은 점을 바라봐주던 난데, 서두르지 말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라고, 남들이 나아가는 과정을 높이 평가해주던 난데. 나는 왜 이렇게 나에게만 야박할까. 절대 남에겐 하지 못할 비난들을 나에겐 이렇게 쉽게 쏟아내고 있을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눈물이 났다. 내게 너무 미안해서. 상처 받은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결심했다.


‘남에게 못할 말은 나에게도 하지 말자’


그날부터 나를 남으로 대하는 연습을 했다. 실수를 해도, 계획을 다 해내지 못해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으려 했다. 순간 습관처럼 욱하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다가도 한 발 뒤로 물러나 타인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나를 친구처럼 대하는 내가 다가와 변호를 해줬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렇게 실수하고 배우다 보면 나아지겠지. 오늘은 저번보단 잘했잖아” 같은. 나를 남으로 대하면서 나는 나와 더 가까워졌다. 나를 비난하는 대신 내 편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서도 조금씩 벗어났다.


어느 날 면접 연락을 받고서도 외국어로 면접 보는 게 너무 무서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내게, 내가 말했다. “그래도 너는 실전에 강하잖아. 막상 닥치면 잘할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준비해 놓은 내용 한 번만 보고 가자” 그렇게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남들이 봤을 때 최선은 아니더라도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포기하지 않는 최선’을 다하도록 응원했다. 그렇게 포기하려는 나를 일으켜 세워 면접을 봤던 그 날, 그 회사에서, 나는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돌아보면 나를 쓸모없게 만든 것도, 또 나를 쓸모 있게 만든 것도 모두 나였다. 내가 내게 ‘너는 쓸모없다’고 말하면 나는 상처 받아 우울 속에 들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됐고, 내가 울고 있는 내게 다가가 ‘너는 그래도 할 수 있어’라고 응원하면 나는 또 용기를 내어 나아갔다. 세상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응원해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이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며 지지해주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평생을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기에 나는 나를 지지해주는 그 한 사람이 내가 되기로, 평생을 나의 적이 되는 대신, 나의 편이 되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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