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니스홍 Apr 29. 2019

따내기, 거두기

움켜쥐거나, 떠받치거나

다음주까지 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내일이 마감이다. 큰일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있든 한달의 시간이 있든 마감 전날에 몰아쳐서 일하게 된다. 자칫하면 기한을 넘기거나, 기한안에 하더라도 몰아서 하려니 너무 힘들다. 할 일의 양을 일곱 덩어리로 나눠서 하루에 1/7씩 한다면 하루하루가 더 편할 것 같다. 혹은 하루치 일을 일곱번 쌓아서 마감 전에 몰아서 하는 일보다 7배의 품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왜 그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음 속에서는 할일보다 일주일이라는 기간이 부각된다. 일주일이 지나면 '그것'을 얻는다. 학생이면 점수, 회사원이면 고과나 월급이다. 혹은 문제가 사라진 후의 후련함을 원할수도 있다. 당장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이므로 얼른 일주일이 지나 현재 힘든 상황이 사라져 버리는게 목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목표와 무관한 일이 필요하다. 예컨대,


나는 점수를 얻고 싶은데 당장 해야 하는 건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일이다.

나는 월급을 얻고 싶은데 당장 해야 하는 건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은데 당장 해야 하는 건 제품을 만드는 일이다.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일은 목표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A를 원하면 A가 아닌 일을 해야 한다. 도둑이 아닌 이상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 돈을 목표로 한다고 남의 지갑에서 돈을 집어오는 사람을 도둑이라고 부른다. 일이 실제로 되기 위해서 내가 주의를 두는 곳은 눈앞의 흙 한 삽이지, 나중의 풍년이 아니다. 열매를 얻고 싶다면 당장 할일은 밖에 나가 흙을 갈아엎는 일이다. 할일이 아니라 목표에 주의를 둔다면 정작 해야 할 일이 뒤로 밀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된다.

일에는 관심이 없고 목표에 관심을 둘 때 우리는 일을 미룬다.

왼쪽 그림은 따내는 과정이다. 목표를 얻고 싶으니 목표를 향해 손을 뻗는다. 오른쪽 그림은  거두는 과정이다. 목표를 얻고 싶으니 언덕을 만들어서 목표에 닿는다. 오른쪽의 그림은 목표를 움켜쥐는게 아니라 목표에 손이 닿기 위한 다른 일을 해서 자신을 떠받쳐 올린다. 움켜쥐는데 관심을 두는가, 떠받쳐 들어올리는데 관심을 두는가의 차이다. 얻겠다는 태도와 짊어지겠다는 태도의 차이다. 왼쪽은 무책임이고 오른쪽은 책임이다. 자기 자신을 보다 높은 위치로 영구히 떠받쳐 올리는 과정,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무책임은 당장 따내는데 주의를 두다가 나중에 움켜쥔다.
책임은 당장 짊어지는데 주의를 두다가 나중에 거둔다.


공부로 예를 들자. 유능하게 되려고 공부한다면서 사실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공부한다. 유능하다면 점수를 얻지만 점수를 얻는다고 유능한 건 아니다. 당장 문제가 풀리든 말든 문제에 주의를 장기간 기울이면 나는 유능해지고, 유능해지면 결국에 점수가 거둬진다. 점수는 내가 애써서 얻는게 아니라 내가 애써서 쌓아올린 능력치 때문에 나중에 수확하게 된다. 

성과는 움켜쥐는게 아니라 나중이 되어서 자연히 거두는 것이다.

예컨대 매일 세수를 하다보니 비누가 어느새 닳아 없어지는 식이다. 세수하듯이 공부를 한다면 어떨까.


언덕을 만드는 공부를 해내면 자기 언덕 수준의 일을 짊어지고 대가를 그대로 거둘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우리는 일상 한국어를 평소에 잘 구사하기 때문에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어떤 일상대화도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누가 어떤 말을 걸든 대처할 수 있도록 나는 항상 대비되어있는 셈이다. 이 능력은 내가 죽기 전까지 영구적이다. 점수나 월급과는 무관하다. 내가 모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데 점수나 월급이 어떤 역할을 했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시험 전날에 몰아서 공부를 하면 시험 후에 내용을 잊어버린다. 나 자신을 영구적으로 유능하게 떠받치는데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성적을 움켜쥐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니 시험후에 내용을 굳이 기억할 이유가 없다. 잊어버리는 쪽이 더 효과적이다. 학교에서 당장의 점수 따내기를 반복하면, 자기를 떠받쳐 올리고 성적을 거두는 기분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졸업한다. 시험을 보는 족족 다 잊어버렸으니 회사에 가서 기여할 수 있는게 없다. 나이를 먹는데 더 유능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한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생존할 입지가 좁아진다. 자기 점프력이 닿는 범위의 열매가 다 떨어지는 때가 와서야 위기감을 느끼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느끼지만 이 나이를 먹고 이제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는 지경을 맞는다. 바뀌어 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당장에 바뀌려고 버둥대지만 여전히 이전의 실패와 같은 논리로 쳇바퀴를 돈다. 내 인생이 바뀌는 그 결과와 무관한 할일로 나를 떠받쳐 올려야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는데 여전히 바뀌는 결과에 욕심을 내기 때문이다.

일을 하니까 목표가 거둬지는 것이지, 목표가 일을 하게 해주는건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다르게 살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