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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n 28. 2021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사람 참 곤란하게 하지

스무 살쯤부터 알고 지낸 아이가 있었다. 인터넷이 아직 신식 문물이었던 시절 동호회에서 만났다. 빠르게 변한 유행 속에 우리가 만났던 커뮤니티는 소멸되어갔지만 새로 생겨난 SNS에서도 연을 이어갔고 몇 년에 한 번 정도 연락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10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묻지도 않고 통장에 남은 20만 원 중에 10만 원을 부쳐주기도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아이가 만나자고 한 것도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SNS로 만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자리가 청첩장을 받는 자리일 줄은 몰랐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처음 보는 예비신랑과 말하는 것만큼이나 처음 먹어보는 쌀국수도 어색할 따름이었다. 쌀국수의 유행이 벌써 전국으로 퍼질 때쯤이었지만 여전히 식권이 아니면 외식 한 끼 값이 부담스러웠던 나에게는 고급 음식이었다.


청첩장을 받아 들고 낡은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서울의 젊은이들은 참 말끔하게 잘 차려입고 다닌다. 대학 때부터 외출할 때만 아껴 입어온 내 외투는 촌스럽고 낡아있어서 어쩐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당장 결혼식에는 뭘 입고 가야 하나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쌀국수의 고기 국물 냄새도 목구멍으로 새어 올라왔다. 혓바닥이 텁텁했다.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난한 게 문제가 되는 삶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것도 많지 않았고 집안을 짊어지는 부담도 다행히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이 적은 것뿐이니 이건 가난이 아니라 소박한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결혼식 갈 때 입을 옷을 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옷값과 축의금으로 낼 돈을 셈하고 나서, 대출을 받지 않고서야 그럴 돈이 없다는 걸 깨닫고 비로소 인정했다. 어떻게 그 정도의 돈도 없냐 싶겠지만 진짜 없었다. 나는 가난했다.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늦잠 잔 척을 했다. 연락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연락도 제대로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손절당했다.


손절당한 관계가 아쉽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끝났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지금도 누군가의 결혼 소식을 들은 저녁 잠자리에서 종종, 돈이 없어서 어찌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 솔직하게 말할 걸 후회하곤 한다. 차라리 뻔뻔하게 일단 참석해놓고는 '돈이 없어 미안하다'하며 인사만이라도 하고 나올걸 그랬다. 청첩장을 받자마자 미안하다 못 간다 말해버릴걸. 아니, 몇 년 만에 보자는 연락에 아무 생각 없이 나가지를 말걸.


적당한 때에 연락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못 갈 것 같지만 정말 축하한다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가난을 느끼고 초라함에 빠져들어 구질구질해질 대로 해진 마음은 담백하게 판단하는 걸 방해하곤 한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다른 방식으로 처신하더라도, 그 결과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방식의 구질구질함이냐, 저런 방식의 구질구질함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여전히 나는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난한 게 문제가 되는 삶은 아닌 것 같다. 중형차 정도는 몰아줘야 안전하다거나 해외여행 한 번씩 나가줘야 세상이 보인다는 사촌들의 말에도, 대출을 껴서라도 집을 사는 게 낫다는 선배들의 말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이니 내 방식대로 내 여유만큼만 하며 살겠다고 겸허하게 넘길 수 있다.


그래도 다 같이 모이는 자리의 밥값이 너무 비싸 머릿속으로 생활비 계산을 하게 되면 쪼그라들곤 한다. 연로한 부모님께 기념일이라고 용돈이라도 부치려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하며 조금이라도 적은 금액으로 입력하고 있는 손가락 끝이 초라하다.


돈이 더 많으면 좋을 텐데. 얼마만큼의 돈이 있으면 초라하지 않을까 상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한 달에 한 번쯤 명품을 살 수 있는 정도일까? 내 집이 있는 정도일까? 건물이 한 채 있는 정도일까? 대기업의 거물급 주주가 되는 정도일까? 어느 정도로 상상해보아도 딱 그만큼의 경계선 어딘가에서 그 너머를 넘어보면서 구질구질해질 것 같다.


내가 가진 것 너머를 욕심내는 시간은 잠깐으로 두고, 나머지 많은 시간을 지금 가진 것을 가꾸는 데 쓰기로 했다. 가끔 초라해지고 구질구질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와도, 조금 못난 한 구석을 어여삐 여기며 안고 가기로.


곤란하면 곤란한 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쩌려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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