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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n 21. 2021

그냥 살아도 괜찮아

[시작의 글] 이번 생이 망했어도 오늘 하루가 행복해

볕이 좋은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날 사둔 편의점제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커피를 먼저 입에 머금으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망한 거구나.


일을 줄여나가고 시간을 줄여나가고 아예 다른 일로 바꿔보기도 하면서 무수히 많은 횟수로 망했다 를 외쳤다. 그때마다 괴로웠고 아직은 아니며 어떻게든 벗어나리라 다시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갈 방법을 찾겠노라 애썼다. 그리고 이제는 애써 노력해서 돌아간들 원래의 내 자리는 아닐 것이며, 애초에 내 자리가 맞았는지도 의문스러우며, 굳이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인정했다. 나는 망했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받아들이는 것.

언제나 이게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음. 망했군. 하고 창 밖을 보는 데 마음이 너무 평온해서 되려 이상했다. 이래도 되나? 목놓아 울지는 못하더라도 비참하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좋아하는 계란과 양상추가 든 샌드위치는 아직도 싱싱하게 맛났고 달달한 캔커피는 시원했고 하늘의 푸른빛은 그날따라 고왔다.


좋은데?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과 글들은 넘쳐난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이래라저래라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는 말들은 참 많이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미 망했다면, 이미 실패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듣지 못하고 살아왔다. 다시 도전하라. 재기할 수 있다. 이런 건 아직 여력이 남아있을 때의 이야기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나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지금 기분 괜찮아?

그럼 됐네.

거, 뭐, 그냥 그렇게 살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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