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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Sep 17. 2021

예쁘다는 말, 귀엽다는 말

사랑한다는 또 다른 말

"이쁜아, 왜 심통이 났냐?"


기분이 상한 티를 내면 남편은 이렇게 묻는다. 이쁜이라니. 마흔 넘어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나잇살이 늘어져가는 아줌마에게 가당치도 않은 호칭 같아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 뱃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왜, 귀엽기만 하고만. 아주 토실토실 자알 크고 있구나~.


세상에나, 귀엽다니. 어려서부터 어른스럽게 생겨먹어 귀엽다는 말은 들어본 역사가 없다. 분명히 뱃살을 놀려먹고 있는데도 귀엽다는 말이 귀에 꽂혀 징글징글하다. 그런데 그게 또 싫지만은 않은지 예민했던 감정도 조금씩 풀린다.  남편은 이렇게 매번 예쁘다, 귀엽다는 말로 곤란한 상황을 잘도 빠져나간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는 수상한 남편이다. 물론 이나영은 빼야 된다. 이보영도 빼야 된다. 이 씨 성의 여배우들은 못 이긴다. 아무튼 남편도 눈이 달렸는데 세상에 예쁜 사람들 다 보면서도 내가 제일 예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거나 강력한 생존본능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언젠가 남편이 친구와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친구의 아내는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인데, 나이가 들고 하니 그분도 살이 붙고 그랬는지, 아내들의 늙어가는 외모를 두고 이야기 중인 듯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웃으며 말하길,


"남들 보기 좋은 거 다 쓸데없어, 인마. 얘 이쁘고 귀여운 거 나만 알지롱. 이렇게 생각하면 완전 내 사람 같고 더 좋지 않냐?"


아, 그랬다. 남편은 원래 이런 놈이었다. 자신의 것에 온전히 마음을 쏟고 아낄 줄 아는 사람. 나는 남편에게 온전한 '내 사람'이어서 정말로 예쁘고 귀엽게 보이나 보다.


아름답다거나 잘생겼다는 외모를 평가하는 말과 다르게 예쁘다는 말은 조금 감정적이다. '예쁘게 생겼다', '코가 예쁜 편이다' 라는 말이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 될 수 있는 반면에, 막연하게 예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좋다'라는 감정이 짙게 섞여 호감과 애정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귀엽다는 말은 더한데,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야만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 같이 살며 얼굴이며 몸매며 행동거지까지 눈에 익을 대로 익어 새로이 감탄할 것도 없을 부부 사이에 '예쁘다', '귀엽다'라고 말하는 건 사실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는 중년의 나이에 남편에게 늘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며 사는 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남편을 사랑해줘야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집어 보이며 "이쁜 애가 허물도 아주 예쁘게 돌돌 말아놨네"라고 말하고, 김치통을 엎으면 "이쁜아, 김치가 너무 미워서 혼내준 거지?"라고 한다. 화났다고 입을 꾹 닫고 성질부리고 있으면 "아이고, 저 입술 오동통하게 내민 거 봐, 귀요미 군필 여중생이 따로 없구먼"이라고 해준다. 화는 났는데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는 남편이 내 눈에 참 귀엽다.


한때 인간을 구성하였던 허물 - 자유를 갈망한 동선과 꼬물거림이 드러나 매우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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