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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Sep 21. 2021

며느리로서는 0점이지만

반려 인간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편

이번 추석은 집에서 혼자 지낸다. 결혼 후 명절이랍시고 시댁에 같이 내려간 적이 반쯤, 남편만 보내고 못 내려간 적이 반쯤이다. 몇 번은 남편도 나만 혼자 두기 마음이 쓰였는지 귀향을 포기하고 같이 있기도 했는데, 자주 보지도 못하는 아들 얼굴 그리워할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짓는 기분이 들어 이제는 혼자라도 내려보내고 있다.


결혼 전에는 생각 못했던 아주 큰 문제, 시댁이 많이 멀다. 그 긴 거리를 다녀오고 나면 짧으면 사흘, 길면 이레를 허리가 굳어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한다. 요 몇 년 간은 한 번 갔다 하면 차 안에서부터 벌써 아파서 난리를 치른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률의 명절 열차표 끊기에 실패하면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가는 건 이제 쿨하게 포기한다.


시댁에 도착했다 한들, 며느리 노릇은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 시어머니는 못난 며느리를 포기한 지 꽤 되셨는지, 도착도 하기 전에 음식이 다 마무리되어 있다. 느리가 아니라 애매한 손님처럼 머물다 오곤 한다.


결혼하고 처음의 한동안은 명절에도 반드시 내려가려고 하고 전도 같이 부치려고 하고 설거지는 나서서 다 하려고 굴기도 하면서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몸이 아파오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며느리는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 나는 왜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를 맺어버렸는지, 가족관계라면 징글징글하던 내가 왜 결혼을 해버렸는지,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도 왜 아직도 모자란 며느리에 불과한 건지, 이 와중에 멀쩡한 남편은 왜 그리 미운 건지.


어느 해인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서러워 펑펑 울며 남편에게 서운함을 쏟아냈다. 고생했다 달래줄 줄 알았던 남편은 되려 나에게 서운하다고 했다.


"너, 날 위해서 우리 집에 같이 가는 거냐? 아니면 네가 예쁨 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며느리 역할 욕심내는 거냐?"

"할 건 해야겠다 싶어서 하는 거지. 그런데도 한 소리씩 듣고 그러면 얼마나 스트레스인 줄 알아?"

"그거 욕심이라니까? 넌 너 자신을 그렇게 모르냐? 너한테 참한 며느리가 맞는 옷이냔 말이야. 니 성격에 꾹꾹 참고 좋은 며느리 되면 쌓아둔 거 다 나한테 풀어야 될 거잖아. 그게 어떻게 날 위하는 거냐."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대충 듣고 대충 넘기라고! 듣기 싫은 말 계속 들리면 평소 싸가지대로 그냥 자리 피하라고! 하기 싫은 거 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 이유로 우리 식구들이 뭐라고 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해줄 수 있어. 그런데 네가 다 괜찮은 척해놓고 돌아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그게 되냐?"


"좋은 며느리 욕심은 버리시고, 좋은 각시만 해주라. 결혼할 때 말했잖아, 우리 집에서 드잡이질만 안 하면 된다고."


미친. 시댁에서 욕하고 멱살잡이 하면서 싸우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 진심일 거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믿는다 한들 그게 되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했는데, 내가 되네? 역시 남편은 나를 제대로 알아봤다.



혼자 시골집으로 출발하는 남편을 배웅하며 혼자 있을 시간들의 쓸쓸함을 먼저 당겨 느껴버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긴 시간 차를 타고 혼자서 고향에 가는 저 인간 속은 또 어떻겠냐 싶어서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야 늘 차고 넘치는데도 명절이면 유독 외로운 건 어째서일까. 해를 거듭해도 적응이 되기는커녕 외로움은 더 커지기만 한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려 하면 괜스레 울적하고 외로운 기분인 것처럼, 나이가 들면 명절이 그런 날이 되나 보다. 함께인 게 너무나 당연해서 혼자이면 더욱 외로워지는 그런 날. 그래서 어른들은 명절만 되면 그렇게도 자식들을 보고파했나 보다. 우리가 찾아가지 못할 때마다 시어머니도 그렇게 쓸쓸하셨겠지. 내 위주로 사는 0점짜리 며느리가 되고 나서야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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