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아마 N과의 만남을 말하는 게 아닐까 S는 생각했다. 빛나는 모습으로 S를 구해주고 친구가 되어준 데다가 N을 중심으로 한 다른 친구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며 몇 번이나 같은 반이 되었으니 둘은 어느새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친이 되었다.
"이것 봐. 이렇게 하니까 좀 사람 같다, 얘."
S의 얼굴에 뽀얀 파우더를 톡톡 발라주던 N이 거울을 내밀었다. S는 하얘진 얼굴이 어색하기만 했다. 특별활동 시간이었지만 N의 권유로 함께 가입한 사진부에 지도교사는 자주 오지 않아 사진 부실에서는 학생들끼리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예... 예뻐진 건가?"
"예뻐졌지! 가만있어봐. 입술은 발라줘야지."
"립스틱이야?"
"아니, 틴트라는 거야. 립스틱은 아줌마들이나 쓰는 거고, 요즘 잘 나가는 애들은 다 틴트 써."
S는 화장품은 전혀 몰랐지만 입술에는 틴트를 바르는 거라고 기억하기로 했다. '아이, 이뻐라'하고 감탄을 연발하며 N은 S의 입술을 불그스름하게 칠했다. S는 정말로 예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S는 N에게 그동안 친구들과 잘 지내는 방법부터 교복 예쁘게 입는 법, 소풍 갈 때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가는 법, 노래방에서 센스 있게 재미있게 즐기는 법까지 많은 것을 배워왔고, 이제 화장하는 방법도 배웠다.
"학교 밖에서는 이 정도는 하고 다녀야지. 다른 애들도 다 화장하고 다녀. 선생들한테 걸리지만 않게 조심하고."
"응, 알았어."
"그나저나 S, 너 이번에 어디로 정했어? 문과? 이과?"
"글쎄, 아직 모르겠어."
"뭐 되고 싶은데? 꿈같은 거 말이야."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헐!"
N이 어이없다는 듯 한심하게 쳐다보는 바람에 S는 정말로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N은 어떻게 할 거야?"
"나? 난 문과지. 근데 어차피 나 예체능 쪽으로 갈 거라서.
비밀인데, 나 아마 연예기획사에 들어갈 것 같아."
"기획사?"
"응. 곧 오디션 보러 가기로 했거든. 오디션이긴 하지만 거의 합격이라고 생각하라더라고, 거기 실장님이."
"와! 진짜 대단하다!"
장래희망이라거나 미래라거나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S는 벌써 벌써 사회에 발을 디딜 준비를 하는 N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한심한 자신과 연예인이 된 N을 상상했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N이라면 스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N이 스타가 되면 지금처럼 편하게 같이 지낼 순 없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슬펐지만 N은 그만큼 멋있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S야, 넌 수학 잘하니까 이과로 가면 되겠네. 이과에서 의대를 갈 수 있거든? 의사가 되는 거야. 친구끼리 연예인과 의사, 멋지잖아. 돈도 많이 벌고."
"의사? 내가 할 수 있을까?"
"넌 공부는 좀 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공부를 아주아주 잘해버리면 되지."
"그럴까?"
"그래. 그러자."
의사라면 스타 연예인과도 어울릴 자격이 있어 보였다. 돈을 많이 벌면 스키장 같은 곳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겠지. S는 다른 친구들과 스키장에 간 N을 기다리던 지난겨울방학을 떠올렸다. 한동안 스키인지 스노보드인지 하는 이야기만 계속되는 바람에 N과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던 시간들.
"알았어. 나 의대에 가볼게."
"근데 아까부터 쟤들 뭐야?"
N은 1학년 후배들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저쪽에서 우리 보면서 뒷담 화하는 것 같은데?"
"?"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선배인 S도 사진기가 없으면서 자기들한테만 사진기 가져와 연습하라고 한다면서. 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선배들한테. 우리 1학년 때는 정말 선배들 눈도 못 마주쳤잖아."
"그렇긴 했지."
"우리가 기를 잡으려고 해도 자꾸 네가 적당히 넘어가자고 하니까 이 꼴이잖니. S, 오늘이라도 제대로 애들 기강 좀 잡자고!"
"내가?"
"우리 다 한 번씩은 애들 혼냈잖아. 애들이 '선배님'하고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른 그날. 따귀 맞은 애도 있었을 걸? 근데 네가 자꾸 대충 넘어가니까 너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 선배들을 만만하게 보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네가 해야지"
"아, 알았어."
S는 자리에서 일어나 1학년 후배들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하더라?'
매섭게 후배들을 쏘아보는 눈빛을 유지하면서 급하게 기억을 되새겼다. S가 1학년이던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 고함, 약간의 욕설과 어깨를 미는 정도의 폭력을 기억했다. 따귀는 아주 심각한 경우로 미루고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여차하면 마음먹어야 했다. 또 뭐가 있었지? 선배들이 어떻게 할 때 제일 무서웠더라? S는 열심히 기억을 뒤지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