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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an 05. 2022

삶의 기본을 내 손으로

사소하고도 귀찮은 일들

나에게는 경차가 한 대 있다. 이제는 주차전용이 되어버린 차다. 대부분의 시간을 달리지 못하고 주차장에 가만히 서있어야 하는 차가 불쌍해서 처분할까 생각도 했지만 또 필요할 일이 생길까 쉬이 팔지도 못하고 있다. 배터리 충전과 노후화 방지를 위해 가끔 시동을 걸어주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하는데, 어느새 공기압이 한계치까지 낮아져 있었다. 겨울이라 추워져서 그런 듯하다.


공기압 하나 넣으러 정비소를 들르기 민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동네 한 바퀴 운전도 조금 겁이 나는 허리 상태라 직접 공기압을 채워보기로 했다.


차를 살 때 트렁크의 장비를 보며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지만 몇 년이 지났으니 당연히 다 잊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있지. 인터넷이란 중요한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사소한 정보는 차고 넘치는 법, 역시 자세히 설명한 글과 영상들이 넘쳐났다.


타이어의 마개를 돌려 열고 컴프레셔의 줄을 연결하고 버튼을 눌렀더니 기계의 굉음과 함께 눈금이 올라갔다. 소리가 커서 잠시 놀라긴 했지만 금방 끝났다. 막상 해보니 너무 간단해 허탈할 정도였다. 정작 어려운 건 시거잭에 전원선을 연결하는 것뿐이었다. 어찌나 들어가길 싫어하는지 저항이 막강하여 결국 남편 힘으로 밀어 넣었다.


살면서 생기는 사소하고 귀찮은 일들을 딱히 부탁할 데가 없어서, 혹은 부탁하기가 민망하여 직접 해결하곤 했다. 그래서 이제 세면대 배수관도 갈 줄 알고, 간단한 도배도 할 줄 알고, 각종 가구 조립은 기본이며, 실리콘 마감도 할 줄 알며, 컴퓨터 부품을 간단하게 바꿔 끼우는 정도도 할 수 있다. CPU는 조금 겁이 나서 건드리지 못하지만. 이제는 컴프레셔로 타이어 공기압을 채우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무서움도 당황스러움도 줄어들고 있다.




생을 유지하는 동안 할 일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매일 먹을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쓸고 몸을 닦고 입을 옷을 빠는 일들. 경조사에 들러보거나 인사말을 전하고 부모님의 안부를 물어보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구인 사이트를 둘러보는 일.


대부분은 사소하고, 사소해서 하찮고, 그래서 귀찮은 일들이다. 돌아보면 큰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런 사소한 일들을 놓치곤 했다. 큰 일들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었겠지만 그런 삶이 존재하게 해주는 건 사소한 일들이었다. 큰 목표가 이루어졌거나 실패했을 때,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좌절하여 슬퍼할 '나'라는 것이 잘 유지되도록 돌보는 기본적인 일들은 사소한 그것들이었다.


기본적인 일들이 귀찮은 나머지 누군가가 도와주기만을 바라거나 쉽게 다 처리되기를 기다리는 건 소용없다. 그랬다간 조금만 복잡하고 어려워져도 '이 정도도 못해내는 나'에 대한 괜한 좌절감과 우울감만 더 커진다. 어른이라면 나를 도와줄 사람보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보통이기도 하고.


그래서 삶에서 기본적인 것들, 생을 유지하게 하는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을 할 수 있다면 내 손으로 하려고 한다. 내 삶을 꾸려나가는 일 정도는 직접 하고 싶은 거다. 가사노동이라 이름 붙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존하는 그 기초적인 활동들을 직접 해내면서 스스로를 직접 돌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을 도와주는 세탁기를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현대식 주거환경을 이룬 인류에 감탄하며, 각종 공구와 부품을 쉽게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고도화를 경험한다. 혼자서 하는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조차 세상을 만난다.


그러니까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생각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무능하게만 느껴지더라도, 일단 씻고 일어나서 밥을 먹자. 오늘 잘 씻고 잘 먹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를 정리했다면, 실하게 나를 잘 보살펴주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어도 될 것 같다. 한 인간의 생에 대한 유지관리 업무를 잘해 내었다고 10g 정도 자부심 가져도 될 것 같다. 우리,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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