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기 Dec 30. 2021

2021년이 지나간다

깊고 고요하게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 잦아지는 신랑을 보면서 올해도 연말이 찾아왔음을 실감한다. 회계연도를 따지지 않는 업무라도 연말은 마무리지어줄 일들로 대개 바쁜 법이다. 그래도 12월이면 늘 의무감이 들곤 하던 송년회들이 코로나 덕분에(?) 크게 줄어서 술에 찌들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제 나가야 할 송년회가 없다. 공황장애를 겪은 이후로 일을 그만두고 사람들과 만남을 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인간관계가 원래부터 없었던 양 정리되었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잠시이고 적응하는 동물은 조용히 혼자 보내는 연말에 익숙해졌다.


그래도 문득 한 해를 정리하는 감각을 되살리고 싶어 혼자만의 송년회로 청소를 해봤다.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걸레로 가볍게 닦아주며 내 보금자리를 단장하는 의식이다. 청소용 슬리퍼까지 깨끗이 빨아 널어두고 앉았더니 허리가 뻐근하다. 한 해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면 집안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내 발 밑에서 층간소음을 줄여주느라, 동시에 바닥을 닦아주느라 고생한 슬리퍼다. 납작해진 털을 열심히 솔로 문질러 다시 풍성하게 만들어두었으니, 너는 내년에도 조금 더 고생해야겠다.


올 한 해는 이렇게 아주 고요하게 흘렀다. 큰 사고 없이, 큰 병 없이, 큰 상처 없이, 큰 소리 낼 것도 없이, 시끌벅적한 만남 하나 없이 이렇게 흘러왔으니 참으로 고요하고 다행이었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올해다. 고요함 속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머물렀던 것들이 글자로 풀어져 나오기 위해 구르고 굴러 그 자리를 깊게 하고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작은 웅덩이에서 개울로, 강으로 크게 흐를 수도 있을까. 그 언젠가에 웅덩이가 채 흐르지 못하고 말라 붙는 날이 오더라도, 2021년의 이곳은 작게 일렁이며 조금은 반짝거렸다고 기억하고 싶다.


깊고 고요했던 2021년, 외로움 끝에 글쓰기를 만나 다정해진 한 해를 정리하며.




작가의 이전글 아직도 첫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