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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Dec 20. 2021

아직도 첫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뛴다

눈 구경 못하고 자란 사람

주말에 소복하게 내렸던 눈이 벌써 다 녹아버렸다. 눈이 쌓여 얼어붙어버리면 빙판길에 다치는 사람도 생기니 빨리 녹아 다행인 일이다. 아쉽긴 해도 주말 동안 놓치지 않고 눈 구경도 해두고 나가서 쌓인 눈을 뽀드득 소리 나게 밟아보기도 했으니 괜찮다.

 

첫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폴짝거리게 된다. 새눈을 밟고 싶고 손자국도 내고 싶고 눈사람도 만들고 싶다. 손이 빨개지고 신발이 다 젖어 얼어붙어도 마냥 좋다.


물론 실컷 좋아해 놓고도 길이 얼고 버스정류장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나면 '이 놈의 눈 왜 안 없어지나'하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빗자루로 쓸어지지도 않는 얼어붙은 눈에 가루를 뿌리고 깨부수느라 힘까지 써본 겨울이 지나 봄비가 내리면 '이제야 저 놈의 눈 안 오겠네' 싶어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중년의 생활인이라면 어쩔 수 없다. 결국 눈은 아주 지긋지긋해지는 놈이다.


그래놓고도 다음 해 첫눈이 오면 또 강아지처럼 좋아하고 마는 것이다.


눈 때문에 고생을 해놓고도 다시 첫눈이 오면 다 까먹고 반가워하는 건 아마 어려서 눈을 못 보고 자라서지 싶다. 태어나고 25년 동안 눈이 오는 걸 본 횟수가 서울에 온 첫해 겨울 동안 온 눈보다 적다. 그나마도 내리기 무섭게 녹아버리는 바람에 25년 동안 눈이 쌓인 광경은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향에서 "첫눈 오는 날 다시 만나자"는 말은 다신 보지 말자는 말이나 매한가지였다.


성장기의 기억이 더 오래 각인되는 걸까. 그 후로 십수 년 동안 눈을 보고 눈 때문에 고생해놓고도 여전히 첫눈이 오고 세상이 하얗게 덮이면 늘 새롭고 설렌다. 그러니까 내가 눈을 보고 행복할 수 있는 건 어린 시절 겪은 눈에 대한 결핍 때문이다.


흔히 결핍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결핍에서 지금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도 고기반찬 보기가 어려웠기에 고기반찬을 먹고 싶을 때 먹는 지금이 행복하다. 누울 자리밖에 안 남는 자취방과 학생회실 잠방을 전전했기에 지금의 작고 낡은 임대아파트도 나에게는 넓고 안락하다. 거의 결핍에서 상처는 잊어버리고 채우는 쾌감만을 남기면 가성비 좋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눈이 오지 않는 동네에서 자라고 스키장은커녕 눈썰매장도 못 다녀본 나의 어린 시절 눈에 대한 결핍이, 이제는 매년 한 번씩은 꼭 설렘과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선물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첫눈이 오면 설렌다. 큼직한 눈송이가 나풀나풀 내려앉는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아도 지겹지가 않다. 집이며 차며 나무며 모두 크림을 덮어쓴 듯 하얗고 반짝거리는 세상도 볼 때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다. 눈이 쌓인 날은 밤에도 조명 빛을 품은 눈들이 은은하게 밝혀와서 환상적이다. 지겨워질 때 지겨워하더라도 고생할 때 고생하더라도, 매 해의 첫눈만은 어린 시절의 나를 데려와서 행복하게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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