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7 – 함께와 혼자의 리듬

by 강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로새서 3:21)


책이 막 재미있어지려는 순간, 작은 발걸음이 달려와 내 앞에서 멈췄다.


“아빠, 나랑 놀자.”


말끝에 기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책을 들고 있었고, 아이는 나를 들고 있었다.

“조금만 이따가.”

그 말이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는지, 아이는 입술을 쭉 내밀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읽던 책의 한 페이지를 마저 읽고 싶었고, 아이의 지금은 나를 마저 안고 싶었다. 사랑의 시간표가 어긋나면, 같은 집 안에서도 작은 이별이 생긴다.


잠시 뒤 아이 방 문 앞에 앉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금의 내 마음도 솔직히 건넸다.

“아빠가 너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빠가 오늘 책을 꼭 읽고 싶은 시간이었어.”

말하고 나니 내 말 속에서 뜻밖의 문장이 들렸다. 사랑은 서로를 붙들어 주는 일만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 날에 멈추어 쉬시며 복 주신 것처럼(창세기 2:2–3), 관계에도 멈춤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요한 건 아이를 노엽게 하지 않도록, 거절 속에도 낙심이 남지 않게 전하는 톤이었다(골로새서 3:21).


아이와의 사랑에는 두 결이 있다.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기와 내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사랑하기. 아이가 원할 때 같이 웃어 주는 순간이 있고, 아이의 요구가 모든 시간을 삼키지 않도록 경계를 세워 주는 순간이 있다. 둘 중 하나만이 사랑이 아니다. 어느 날엔 놀이터의 그네를 끝없이 밀어주는 것이 사랑이고, 또 어느 날엔 “아빠가 지금 하던 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같이 놀면 안 될까?”라고 말하며 다음 시간을 약속하는 것이 사랑이다.


심리학에서는 아이의 마음이 예측 가능한 사랑에서 자란다고 말한다(애착이론, 볼비/에인스워스). 언제나 “지금 당장”이 아니라 대체로 믿을 만한 응답, 그리고 어긋난 뒤에 다시 연결되는 경험. 아이의 마음은 그 리듬 속에서 단단해진다. 항상 “네”라고 답하는 것이 안정감을 주는 게 아니다. 때로는 부드러운 “아니오”와 그 뒤를 잇는 약속된 시간을 갖는 것이 아이를 더 깊게 안심시킨다. “지금은 안 돼. 하지만 아빠가 여기 읽는 것만 마저 끝나면 네가 좋아하는 놀이로 30분.” 그리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는 것, 관계는 그렇게 수선되며 자란다.


나는 가끔 두려웠다. 지금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그런데 돌이켜 보면, 아이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함께’가 아니라 함께와 혼자의 균형이었다. 아이가 나를 애착 인형처럼 움켜쥐지 않아도 되는 것, 부모의 하루가 전부 아이에게 종속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아이는 한 사람으로 커 간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의 시간을 존중하는 법도 배운다. 부모도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소모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내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언젠가 아이가 “내 선택의 무게”를 견딜 때, 그 본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된다.


물론 어떤 날엔 책을 덮고 바로 놀아야 한다. 아이의 눈물이 이미 오늘의 전부인 날이 있고, 그 눈물 앞에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어떤 날엔 아이의 토라짐을 껴안고도 “지금은 안 돼”를 지켜야 한다. 사랑은 항상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린도전서 13:4–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둘의 선을 찾으라는 초대다. 나의 오늘과 너의 오늘이 함께 안전해지는 지점.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누우면 낮의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아이의 입술이 삐죽해지던 순간, 문지방에 앉아 나눈 화해, 그리고 약속을 지키고 함께 만든 완성된 퍼즐. 아이는 내 품에서 잠들고, 나는 그 이마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기도한다. 주님,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배우게 하소서. ‘지금’과 ‘나중’을 통해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언젠가 역할이 바뀌는 시간이 오면, 내가 “같이 걷자”라고 말하겠지만 아이의 일정이 바쁠 수 있다. 그때도 오늘의 이 연습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거절이 미움이 아니고, 기다림이 버림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와 혼자가 번갈아 오는 리듬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사람이 되어 간다. 오늘은 책장을 덮고 놀았고, 내일은 아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오늘은 아빠하고 뭐 하고 놀까?”라고 먼저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말 속에 담긴 존중이,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고 싶은 사랑의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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