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23)
어느 밤, 불을 끄고 누우면 속이 먼저 중얼거린다.
“도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뭘 했나.”
즐거운 날엔 잘 올라오지 않는 문장이다. 대체로 일이 꼬였을 때, 혹은 타인의 타임라인이 유난히 반짝이는 날에 튀어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사람도, 내 생일 케이크 사진을 보며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뭘 했지?” 그러니까 이 한숨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피로가 만들어 낸 그림자에 가깝다.
심리학에서는 나쁜 뉴스가 좋은 뉴스보다 더 크게 와닿는 경향을 "부정성 편향"이라 부른다(Roy F. Baumeister). 성과가 있어도 금세 “당연”으로 흡수되고, 놓친 것, 남의 빛나는 장면만 남는다. SNS는 그 편향을 키운다. 타인의 삶은 하이라이트 편집본, 내 삶은 무편집 원본으로 비교하는 셈이니까. 그 비교 속에서 오늘을 버텨 낸 수많은 보이지 않는 수고는 통째로 지워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우지 않으신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
하루치 눈물과 숨, 끝까지 자리를 지킨 몸, 포기하고 싶던 마음을 붙잡은 그 순간,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살아냈다". 우리가 하루를 버텨 내는 최전선은 때로 회사의 보고서가 아니라, 새벽에 깨는 아이 옆, 병원 복도, 서류철 앞, 조용히 버스를 타는 뒷모습에 있다. 그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은 것, 비난 대신 침묵을 택한 것, 상처를 품고도 다시 웃어 본 것, 하나님은 그런 "생활의 용기"를 귀하게 세신다.
성경은 ‘충분함’을 성과의 합계가 아니라 '하루의 은혜'에서 계산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11)
하루치 은혜와 하루치 힘.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자비(애가 3:22–23). 이 좌표를 붙들면, 남들처럼 크게 이루지 못했다는 낙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오늘도 내 몫의 시간을 성실히 건넜다'는 감사로 옮겨 앉게 된다.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수확이 늦을 수는 있어도, 씨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혹시 마음속 판사가 또 묻는 날이라면, ‘증인’ 대신 하루의 장면들을 조용히 불러낸다.
병원 복도 끝, 물컵을 비우며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던 오전의 공기.
출근 게이트가 “띡” 하고 열리던 수백 번의 새벽.
관계를 지키려고 삼키고 지나간 말이 목 안에서 소금처럼 남아 있던 저녁.
설거지 거품 위로 달이 올라오던 밤.
이 모든 것이 이력서엔 없지만, 주의 책에는 접힌 자국까지 고스란히 적혀 있을 것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살아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안주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살아냈다'는 고백은 멈춤의 면허가 아니라 다시 걸을 힘이 된다.
“나는 오늘도 잘 버텼다”
이 문장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내일의 작은 변화를 더 담대하게 시작할 수 있다. 존재가 이미 부정되지 않았으니, 시도해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밤,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보자.
"뭐 하긴, 오늘도 살았다. 잘 살아냈다."
그리고 조용히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다.
"잘했어. 여기까지 온 너, 참 잘했다."
기도 한 줄로 끝맺는다.
주님, 오늘의 모자람을 정죄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의 성실을 가볍게 보지 않게 하소서.
아침마다 새로우신 당신의 자비로 내일 한 걸음, 다시 걷게 하소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