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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May 08. 2022

비는 죄가 없다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아본 적이 있는가?

 평균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비 오는 날을 선호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어두운 색깔의 하늘도 좋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어진다. 나가려면 옷 색깔도 제한적이 되고, 당장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어야 한다. 예쁜 우산이나 패션적인 우월함이 드러날 정도의 우비를 미리 구매해서 비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럼 비 오는 날에는 매번 기분이 가라앉아야 하는 것일까? 비가 무슨 죄인가? 비 입장에서는 대단하게 억울할 만도 하다. 일단 스스로 내리고 싶어서 내리는 것도 아니다. 과학적인 근거를 생각해봐도 정말 어쩔 수 없이 내린다. 심지어 비가 내려서 유익한 것이 훨씬 더 많다. 땅의 모든 생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 자격이 있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위에 언급한 그 정도쯤 아닐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부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아주 상대적인 것이다. 똑같은 물이 하늘에서 내려도 겨울에 내리는 눈은 비에 비해서 그나마 선호도가 좀 낫다. 왜 그럴까? 겨울에 내리는 눈은 일종의 추억이 담겨 있다. 보기에도 예쁘고 눈싸움했던 경험도 있고, 신나게 썰매나 스키를 탔던 경험도 있다. 무엇보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연인과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는 첫눈도 있다. 그렇다고 눈이 다 좋을까? 눈이 싫은 사람은 그것을 치워야 하는 사람이거나 나이가 들수록 추억과 낭만에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눈이 녹으면 길이 더러워지고 미끄러우면 또 넘어질 것들을 걱정할 뿐이다. 다시 또 강조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부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관련된 추억을 만들면 좀 괜찮아질까?

 몇 해 전에 두 딸과 글램핑을 갔다. 두 달 전부터 날짜를 잡고 장소 예약을 하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면서 준비를 했다. 딸들에겐 난생처음 가보는 글램핑이다. TV에서 나온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봤기 때문에 기대가 더욱 컸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예쁜 조명도 걸어놓고, 모닥불도 피워서 불멍도 하고, 맛난 고기를 구워서 먹는 것은 최고의 정점이 되는 이벤트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늦잠을 자도 전혀 상관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어른이어도 이런 건 좋다. 하물며 초딩에겐 정말로 신세계였고, TV에서만 보던 것이 나에게 실현되는 엄청난 순간인 거다.

 하지만 당일 비가 엄청 쏟아졌다. 정말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이 화가 났다고 충분하게 인정해 줄 정도로 말이다. 제법 인생을 살아온 내 기준으로도 이렇게 많이 오는 경우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쏟아졌다. 고민이 많았다. 그냥 위약금을 내고 취소를 해야 하나? 이런 날에 가기엔 좀 아쉽고, 가지 않는 걸 생각하니 아이들의 실망스러운 마음과 목소리와 표정이 모두 보이는 듯했다. 취소를 하지 않았지만 비가 쏟아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이들은 실망스러웠나 보다. 난생처음 가보는 글램핑이어서 정말 기대하고 손꼽았는데 비가 쏟아져서 속상했나 보다. 사실 당연했고 나 역시도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른이고 아빠니깐 마냥 풀 죽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실망하고 있는 두 딸에게 난 이렇게 말해줬다.

 "걱정하지 마. 일단 오늘만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다른 날에 또 갈 수 있어. 그러니 오늘 비가 온다고 속상해하지 마." 그러면서 이어서 말해줬다.

 "그런데 아마도 오늘 이렇게 비 오는 날 가는 게 평생토록 기억에 남는 글램핑이 될걸?"

 출발할 때 해 준 이 말이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거다. 말 그대로 우리는 평생토록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냈다. 비를 흠뻑 맞으며 놀았다. 아마 어른 기준으로도 '내 평생에 이렇게 비를 많이 맞아본 적이 있나' 싶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들 기준에서는 비를 그렇게 맞아본 자체가 처음인 수준이었으니까. 난생처음,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크게 웃으면서 특별한 경험을 한 거다.


 그렇게 비를 흠뻑 맞았던 잊지 못할 글램핑은 몇 년이 지나도 얘기한다.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글램핑이 주인공이 아니라 비를 홀딱 맞은 것이 주인공이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비가 오면 소리친다.

 "우와~ 비 온다!"

 "밖에 나가서 비 맞고 싶다." 비 맞고 싶은 마음은 정말 진심인 거다.

 보통 눈이 오면 창밖을 보면서 "눈이 온다"라고 말을 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이 보겠다며 창가로 몰려들지만 이젠 비가 와도 충분히 그러는 셈이다. 흔히 여행 가는 날 비 오면 망한 여행일 수도 있지만 사실 비 오면 그냥 조금 불편한 여행이 될 뿐이다.

 그건 비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망치는 것은 “비 오면 망친 여행”이라는
내 마음과 태도의 문제다.


 정말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비 오는 날은 여러모로 불편하긴 하다. 아주 안락하게 실내에 앉아서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좋은 커피를 마신다면 비가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겠지만, 오늘 하루 누군가를 만나거나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 예정되어 있다면, 하루 일정을 생각해도 별로이고, 더 예쁘고 좋은 옷을 입지도 못하고 우산을 들고 다니면 사용할 수 있는 손도 줄어들고, 옷도 젖고 눅눅한 느낌도 별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인생을 살면서 비를 흠뻑 맞아볼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있을지. 지금 당장 한 번 곰곰이 기억을 더듬으며 손가락으로 세어보자. 열 손가락까지는 고사하고 한 손의 다섯 손가락을 꼽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을 거다. 나도 생각해보니 비를 흠뻑 맞아 본 경험이 몇 번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비를 기분 좋게 흠뻑 맞는 일이 내 인생에 몇 번이나 가능할까?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깔깔 웃으면서 비를 흠뻑 맞을 수 있는 일이 내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있긴 할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쏟아지는 비가 기다려진다. 올여름엔 비가 쏟아진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을 비를 흠뻑 맞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인생도 삶도 그렇다. 내가 원치 않은 시간들, 사건들이 찾아오고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그런 일들이 삶에 찾아온다. 그건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온다. 그럴 때면 인생이 눅눅해지고 좋지 않은 일들에 젖어버려서 내 인생 자체가 별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이 있다. 끝없을 것 같이 내려갈 때도 사실 끝은 존재하고, 그 끝에서도 내가 누려야 할 무언가가 있다. - 뭔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린다는 표현을 꼭 하고 싶었다. 그 고통 속에서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지 생각하면 그 끝에 묻혀버린다. 반대로 바꾸자.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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