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주일의 “아멘”이 끝나는 순간, 소명은 월요일로 걸어간다. 예배당의 문을 닫고 나오는 발걸음이 출근길의 첫걸음이 된다. 책상, 매장, 교실, 운전석, 싱크대… 우리가 월요일에 마주하는 그 장소가 이번 주의 “사명지”다. 소명은 드문 기적이 아니라 자주 마주치는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월요일 아침의 공기는 사실적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빠르다. 월요병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 속에서 우리는 자주 질문한다. “이게 소명인가? 그냥 생계 아닌가?” 신학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은 일과 예배를 분리하지 않으신다. 주일의 찬양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처럼, 월요일의 작은 성실도 하나님께 올려진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부엌에서 접시를 씻으며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을 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태도의 온도에서 생긴다. 성소는 차가운 싱크대에도 임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직업’(Beruf)을 ‘부르심’으로 불러냈다. “목사만 소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유치원 교사, 배관공, 개발자, 간호사, 부모, 학생도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재발견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말했듯 삶의 어느 영역도 그리스도의 통치 밖에 놓여 있지 않다. 월요일의 현장은 어느 곳이든 그분의 손바닥 안이다.
철학의 언어로 말해도 다르지 않다. 앨러스터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실천(practice)’을 통해 인간이 ‘내적 선’(internal goods)을 배우고 덕을 익힌다고 했다. 보고서 한 장을 더 정확하게 쓰는 일,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고객의 말을 한 번 더 경청하는 일, 혼자 남은 교실의 불을 끄고 창문을 닫는 일, 이런 반복이 우리의 삶을 빚는다. 탁월함은 성취의 높이가 아니라 관습의 깊이에서 생긴다.
심리학도 월요일의 소명을 거들어 준다.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Amy Wrzesniewski)는 ‘직무 재구성(job crafting)’을 말한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무엇을, 누구와, 왜’에 대한 시선을 조금 바꾸면 일의 얼굴이 달라진다. ‘서류 처리’가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아끼는 길 정리’이고, ‘콜 응대’가 아니라 ‘상대방의 불안을 낮춰 주는 첫 목소리’라고 이름 붙일 때, 우리는 월요일의 일을 소명의 문장으로 다시 쓴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보았듯 의미는 밖에서 던져지는 답안지가 아니라, 내가 응답할 질문으로 다가온다. “오늘 내 자리에서 사랑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월요일의 소명이 던지는 한 줄 질문이다.
소명은 감정이 좋을 때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흐리고 몸이 무거울 때,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라는 말씀은 방향이 된다. 오늘의 회의가 지루할 때, 내 말을 인정받지 못할 때, 계산이 맞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지 다시 생각한다.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흔들리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소명은 환호의 숫자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으로 증명된다.
그렇다고 월요일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다. 현실은 복잡하고 일은 때로 부당하다. 소명은 부당함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두 가지를 분명히 한다. 첫째, 정직과 선함은 손해 같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다. 둘째, 나 홀로 선함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공동체를 찾으라. 교회와 동료 신자, 선한 상사와 동료의 작은 연대는 월요일의 무게를 나누는 하나님의 장치다. 공동체는 소명의 허리띠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일(work)의 첫 목적은 돈도, 명예도, 선교의 구실도 아니라 ‘일을 잘하는 것’ 자체”라고 했다. 창조주를 닮아 창조적으로, 구속주를 닮아 책임 있게, 성령께 의지해 견고하게, 그렇게 “잘하는 것”이 월요일의 예배다. 그래서 소명은 직업을 높여 주지 않는다. 사람을 높여 준다. 같은 회계라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수치를 맞추는 손을, 같은 판매라도 눈앞의 사람을 ‘영혼’으로 대하는 태도를, 같은 육아라도 한 영혼을 품는 기도를 높여 준다.
나는 월요일마다 하나의 짧은 의식을 갖는다. 건물 문을 밀고 들어가기 전, 엘리베이터 도착을 기다리는 그 10초, 속으로 한 구절을 천천히 읊는다. “오늘, 주께 하듯.” 신학적으로는 선언이고, 심리학적으로는 주의 전환이고, 철학적으로는 습관의 문법이다. 큰 구호 대신 작은 문장을 몸에 새긴다. 소명은 웅장한 음악보다 낮은음으로 오래간다.
이 글의 제목처럼, 부르심은 월요일에 시작된다. 사실은 매일 새로 시작된다. 어제의 실패가 있더라도 오늘은 새로 부름 받는다. 오늘 할 수 있는 선을 고르고, 오늘 버려야 할 악을 거절하고, 오늘 한 사람을 더 존중한다. 그 누적이 우리의 일을 바꾸고, 우리를 바꾸고, 때로 우리 회사와 동네의 공기를 바꾼다. 하나님은 그렇게 월요일의 작은 순종들을 모아 한 주의 이야기를 쓰신다.
주일의 아멘이 월요일의 시작이 되게 하라. 예배당에서 흘린 눈물이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친절로, 찬양의 고백이 회의실의 정직으로, 말씀의 위로가 카운터 앞의 환대로 번역되게 하라. 그 번역이 바로 소명이다. 그리고 그 번역은 오늘부터, 여기서부터, 내가 선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