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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Apr 21. 2022

최애 간식에서 최악 간식으로

밀크캬라멜이 이렇게 싫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크라운 밀크캬라멜 -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 김재박이 광고모델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저 제품은 1980년에 첫 출시가 되었을거다. 어렸을적에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포장지도 생생하고 겉 포장을 뜯으면 나타나는 속껍질도 생각난다. 7개가 있었던 것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사진을 찾아보니 정확하게 맞다. 7개인 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사연이 있는 간식이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을 보면 제품 앞에 100원짜리 동전이 있다. 제품의 가격이다. 당시에 100원짜리 간식은 비싼 편에 속했다. 내 기억으로 자장면 가격이 300원이었을거다. 택시 기본요금이 500원 쯤 했던거 같다. 그렇게 따져보면 결코 싼 간식은 아니다.

집이 참 많이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간식을 먹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쯤은 저 캬라멜을 사왔다. 먹는 방법은 이렇다. 한 개를 꺼내서 커터칼로 반을 자른다. 그리고 나에게 반쪽, 동생에게 반쪽을 주었다. 그것이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전부다.

7개의 캬라멜이 개별 포장으로 되어 있다. 퀄리티가 있는 간식이라는거다. 7개라서 하루에 한개씩 일주일을 먹을 수 있는 간식인거다

하루 간식이 캬라멜 반쪽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뭐하는 짓인가 싶을 정도의 모습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던 우리에게 그건 탁월한 방법이었다. 그 반쪽 짜리의 캬라멜의 맛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상투적인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정말 꿀맛인거다. 더 먹고 싶어도 참아야 했고, 절대로 씹어서 먹지 않았다. 최대한 애를 써서 천천히 녹여 먹었다. 찌릿할 정도로 달콤함을 선사하고 조금씩 줄어드는 캬라멜의 크기가 야속하기만 했다.

정말 잘 만든 간식이다. 그냥 달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유의 고소함까지 가득하다. 우리가 요즘 먹는 우유라기보다 전지분유 맛의 달콤 고소함이다. 잊을수 없는 맛이지만, 다시 맛볼 수 없는 맛이다. 그렇게 불규칙적으로 먹었던 밀크 캬라멜을 잊을수가 없다. 정기적으로 매월 첫째 주에 먹는다던지 그러지 않았다. 백원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런 불규칙함 속에서 엄마가 밀크캬라멜을 손에 들고 집에 들어선 날이면 나와 동생은 환호성을 지르고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고작 6살과 7살 남매에게는 확실히 어마어마한 아이템임에 틀림이 없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강력한 간식 아이템인 셈이다. 100원짜리 캬라멜로 남매가 일주일간 행복할 수 있으니 정말 가성비 갑이 아닌가? 우리집의 최애 간식으로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런 최애 간식이 어떻게 최악의 간식이 되었을까?


 우리 집이 가난했던 이유는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주 어렸을적 사진을 보면 현대자동차의 야심작인 포니2에 기대고 찍은 사진이 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당시 우리집에는 포니2 자가용이 있었다. 부의 상징중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뭔가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고향인 군산으로 왔다. 그리고 물장사를 했다. 다방. 

다방을 했던 시절은 내 기억엔 전혀 없다. 그저 집에 흰색 컵에 까만색 띠로 디자인된 전형적인 옛날 커피잔과 갈색 줄무늬의 엽차잔이 잔뜩 있는 것으로 기억이 더듬어질 뿐이었다. 폼생폼사의 아버지는 다방이라는 사업보다 사업가로서 내뿜어야 할 아우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듯 싶다. 그래서 자동차를 구입했나보다. 

포드사의 코티나 마크5는 현대자동차의 시작격인 자동차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도 하는 일이 변변치 않아도 차 만큼은 꼭 폼나는걸 타고 다녔다. 심지어 차에 넣을 기름이 없어서 집에 두고 걸어 다닌 적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차는 폼나야 했다. 마크5 라는 자동차는 단칸방에 살던 시절의 아버지의 차였다. 폭이 엄청나게 넓은 자동차였다. 한 번은 여름 휴가를 목적으로 바닷가를 가는데, 친척들 몇 명까지 9명이 타고 간 적도 있다. 그게 가능한 차다. 아버지의 폼생폼사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폼생폼사와 함께 따라붙는 것은 역시 여자였다. 아버지에게 여자는 일종의 전리품이다. 다방을 했던 것도 그렇고, 다방의 여자들을 제법 많이 만나서 바람을 피운 것도 그 때문이다. 엄마도 아버지의 첫 여자가 아니었다. 첫 번째 여자는 군대 갔을 때, 군부대 근처의 다방에서 만난 여자였다. 그 여자에게도 아이가 있었다. 지금은 나의 배다른 형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여성 편력이 심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폭력적인 성향도 강했다. 어린 내가 인지하는 상황에서도 엄마를 향한 폭력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 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린 시절의 암울한 이야기를 더 써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룬다. 오늘의 핵심 메시지는 밀크 캬라멜이니깐.


 엄마는 그런 아버지와 끝을 내기로 결심을 했다. 물론 나와 동생은 그런 결심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난 어느새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가슴에 이름표와 하얀 손수건을 달고 그렇게 난 국민학교 입학식을 했다. 이상하게도 학교에서가 아닌 다른 건물 옥상에서 엄마는 내 입학사진을 찍어주었다. 입학식에 아버지는 없었다. 왜 없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입학식을 그렇게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와 나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난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엄청난 선물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 바로 밀크캬라멜이었다. 그것도 속에 있는 것을 꺼내서 자른 반쪽짜리가 아니라 7개가 모두 들어있는 통째로의 밀크캬라멜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거다. 난 너무 좋아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이것봐. 엄마가 나 사준거야?" "나 이제 1학년 되어서 사준거야?" 일주일 이상에 걸쳐서 반쪽씩 아껴먹던 최애 간식이 지금 내 눈앞에 통째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작은 방에 가도 없었고, 마당에 나가봐도 없었고, 부엌에도 뒷뜰 아궁이쪽에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떠났다. 아니, 어느날 갑자기가 아니라 내가 1학년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버렸다. 마치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최애간식을 마지막 이별 선물로 남겨두고서 그렇게 엄마는 사라졌다. 그것을 인지한 이후로 하루 종일 울었다. 동생과 함께 이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그 다음날이 되어서도 하루 종일 울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때문에 울고, 엄마가 여전히 있을 것 같아서 울었다. 그 다음날이 되어서도 하루 종일 울었다. 엄마가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 울고,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서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또 울었다. 이제는 엄마가 제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엄마와 헤어진 후 밀크캬라멜은 나의 최애 간식에서 최악의 간식으로 바뀌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똑같은 제품이 사라졌지만 8살때 헤어진 이후로 40년이 넘도록 난 한 번도 다시 먹지 않았다. 과연 다시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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