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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Jul 18. 2022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신뢰할만해서 신뢰하는 건 이미 신뢰가 아니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그나마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거나 누군가에게 나름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였다. 할머니가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녀서 나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녔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자의 집안이 우리 집이라는 것이다. 그런 집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리고 새엄마가 10번이 바뀐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둘 중 하나다. 기독교를 믿지만 제대로 믿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 종교 자체가 오류 거나. 

 그런 본질적인 차원의 접근은 뒤로 해야겠다. 


 내가 중학교 1학년, 그러니까 14살의 남자아이에게 그런 본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본질보다 중요한 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어느 곳에서라도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교회는 완벽한 곳처럼 생각되었다. 마음속으로는 수시로 바람난 아버지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정체 모를 어떤 여자를 보면서 역겨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겉으로는 모두 사랑하는 형제 자매일 뿐이다. 나를 향해 보였던 미소, 나에게 건넨 말들이 모두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교회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고, 중학생임에도 제법 열정을 내며 여러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토요일이 되면 무조건 교회에 갔다. 교회를 관리하는 직원인 “사찰 집사”의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서다. 그 부부는 교회의 모든 관리와 청소를 도맡아서 한다. 그래서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누군가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준다면 마다할 리가 없다. 정말 반가운 손길이다. 그래서 빗자루질도 하고 유리창을 열심히 닦는 일도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해준다. 토요일에는 교회에 사람들이 많다. 여러 분야에서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고, 목사님 전도사님들도 교회에서 주일(일요일) 예배의 준비를 위해서 분주하다. 그래서 내 모습은 자연스럽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정말 완벽하지 않은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생 남자아이가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이 좋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이 정말 드라마 같지 않은가?  그렇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던 어느 날, 전도사님이 내게 와서 부탁을 했다. 

 "너 혹시 주일학교 교사하지 않을래?"

 난 귀를 의심했다. '교사라고? 난 아직 학생인데, 선생님이 된다는 건가?'

 "제가 교사를 할 수 있나요?"

 의문스러운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도사님은 말을 밀어 넣었다.

 "당연하지, 물론 아직 네가 어려서 보조교사이긴 하지만 너같이 똑똑하고 훌륭한 형, 오빠라면 다른 선생님보다 훨씬 더 아이들이 좋아할 거야."


 교사라는 것을 한다는 어떤 성취감보다 그냥 누군가 날 인정해 주는 것으로 이미 게임은 끝났다. 인정받고 관심받고 사랑받는 것이 가장 필요해서 버둥거리는 나에겐 완벽한 미끼이자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그래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부모님과 상의하는 것 따위는 내겐 더더욱 필요 없었다.

 "네 좋아요."

 그렇게 나의 교사 인생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그다음 날인 일요일 예배가 있는 날, 나는 내가 주력했던 중고등학생 예배를 마치고 곧장 어린이들의 예배실로 갔다. 전도사님은 너무나도 반갑게 맞아 주셨고, 부서의 대표인 부장 집사님도 어서 오라며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이미 그곳에 있는 선생님들도 마치 정예 요원들 같았다.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집사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부장 집사님, 총무 집사님 두 사람은 거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이곳저곳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다 모여있구나' 그리고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닌가?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교사들의 준비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점검을 한 후, 이제 나를 소개할 차례가 된 것이다.

 "자, 오늘 새롭게 함께 하게 된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000 선생님." 

 모두 박수와 환호를 보내줬고, 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씩씩하게 화답했다. 

 '내가 선생님이라니, 정말 좋다.' 

 내가 보조교사로 섭외(?)된 것은 곧장 있을 <여름 성경학교> 때문이다. 평소보다 행사가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기독교 콘텐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바로 <여름 성경학교>와 <크리스마스 행사>다. 난 더 기대했고 뭐든지 잘하고 싶었다. 


 그렇게 분주하고 정신없고 인정받은 기쁨으로 가득했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돈을 담당하고 있던 회계 선생님이 여름 성경학교를 위해 마련된 예산이 들어 있는 돈봉투를 분실한 것이다. 부장님과 총무님과 회계 선생님, 이렇게 세 사람이 먼저 모여서 회의를 한 듯 싶었다. 이 상황은 분명히 어려운 상황이다. 교회라는 곳의 특수성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사람들을 의심한다거나 이 상황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난감한 그림이다. 조용하게 이 상황을 마무리해야 되는 상황이다. 

 보조교사인 나는 그 상황을 전혀 모른 채 하던 봉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든 순서가 끝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어린이 부서에 있던 동생을 데리고 집에 가기 위해 나섰다. 예배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부장 집사님과 총무 집사님이 앞을 가로막았다. 난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고 그 두 사람을 쳐다봤다. 

 "너네 둘, 가방 줘봐." 

 "가방은 왜요?"

 "달라면 줄 것이지 뭔 말대꾸야?"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면서 내 가방을 뺏다시피 낚아챘다. 난 그들에게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었다. 불과 몇 주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새로 온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던 두 사람인데, 지금 내 앞에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가방을 뺏어서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어서 뒤집자, 안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자 그냥 뒤돌아서 가버렸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그 자리를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너무나도 창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엉엉 울었다. 나중에 전도사님이 내게 사과를 해서 알게 된 내용은 돈봉투를 훔친 범인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 세 사람이 - 부장 집사, 총무 집사, 회계 교사 - 회의를 한 결과가 그거였다. 아무래도 그럴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가방에 넣어 두었던 것을 착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 돈은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세 사람 중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었던 전도사님의 사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들은 지금 장로가 되어 있다. 돈 앞에선 이성을 잃는 사람,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대했던 그 사람들이 교회의 리더이자 어른인 장로가 된 것이다. 


 나도 당해보니 알겠더라. 누군가를 편견 없이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당시에 그들은 그 상황을 해결했어야만 했고,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더 찾아봤어야 했다. 어쩌면 내가 보조교사로 함께 하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간 날부터 이런 일들에 대해서 미리 예단하고 편견을 갖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설령 그런 의심이 들었더라도 조용한 공간에서 확인 과정을 가져야 했고, 무엇보다 상황을 설명해주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더구나 특정인 한 사람을 향해서 그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함께 해줬어야 한다. 학교나 기타 다른 단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되면 그것을 공개하고 모든 사람들의 소지품을 살펴본다. 그것이 맞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의심받으면 안 되지만 의심을 해소하려면 모두 그 일에 함께 동참해야 한다. 심지어 교회라는 곳에서 그랬다는 것은 더 씁쓸함을 가져온다. 물론 교회라고 더 엄격한 잣대를 가져다 댈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모두 예외는 없기 마련이고, 그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부족했을 뿐이니깐.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믿을만하고, 신뢰할만한 환경과 출신, 학벌과 같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어야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보여진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일 뿐. 신뢰는 보여진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뢰할만해서 신뢰하는 것은 이미 신뢰의 진짜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다. 진짜 신뢰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신뢰의 가장 중심이고, 편견을 갖지 않는 마음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일을 겪은 나는 과연 어떨까?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충분하게 누군가를 신뢰하는가? 더 나아가 신뢰를 위해서 다른 것들을 조금 손해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심지어 가족, 친지 간에 나는 과연 어떤가?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과연 난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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