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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Sep 20. 2022

난 왜 공격적 성향일까?

인간관계는 공격과 방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난 대화할 때 공격적이다. 상당히 그렇다. 브런치에 쓰는 글의 문체만 봐도 다정다감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뭔가 달달하게 글을 써보려고 해도 내겐 불가능한 영역이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되니 오죽할까? 게다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부정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른다. 언제나 직구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혹시라도 그 사람이 내 말에 의해서 힘들어할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진짜 그렇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다. 늘 그러면 병원에 가야 한다.
 일종의 논쟁의 상황이 되거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할 때 그 성향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 덕에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심지어 어떤 선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분명히 내가 선배인데, 난 네가 좀 어렵고 무서워."

 또 다른 어떤 선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너무 공격적이야. 대화를 하다 보면 네가 나보다 어린 동생이 맞나 싶어."

 그 선배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마도 참다못해 그 말을 나에게 건네었을 것이다. 심지어 용기를 내어서 조심스럽게 말이다.

 결정적으로 그 말에 나는 충분하게 동의한다. 20대 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의견을 말하는 시간이고, 난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내가 공격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정확하게 맞는 말을 콕 집어서 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좀 들면서 그런 공격적인 성향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을 해봤다. 누구나 공격적인 성향이 되기 쉬운 운전할 때의 모습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전에는 운전할 때 1분에 한 번씩 화내며 욕을 했다면 요즘엔 운전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를 한 번 낼까 말까 싶을 정도다. 굉장한 발전이다.  

 그런데 어떤 의견을 이야기하고 토론이나 회의를 하는 상황에서는 이상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난 말하는 것을 억누른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해야 할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참다못해 한마디 던지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내가 말하는 순간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 버린다. 다시 돌아봐도 분명하게 내가 해야 할 말을 한 것이고, 딱히 틀린 말이 아님에도 상황은 그렇게 된다.   

 가만히 돌아보니 난 단어와 내용 모두 선택할 때 상대방이 반박하지 못하게 할 말들을 꺼내는 듯싶었다. 일종의 한방에 상대방의 입과 생각을 막아버리는 거다. 그건 대화도 회의도 의견 게재도 토론도 아니었다. 일종의 싸움이자 전쟁인 셈이다. 대화를 하면서 내가 이기는 것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이런 내 모습과 성향에 변화가 없어서 - 그렇다고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내 마음에 이제는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말 나의 이런 성향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대화 후에 항상 묻는다. 

 "혹시 내가 좀 공격적인 느낌으로 얘기하지 않았어?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야..." 

 "내가 말투가 좀 공격적이야. 혹시 기분 상한 거 있었어?" 


 내 성향은 왜 이럴까? 내 생각과 판단과 기준에 어긋나면 난 왜 폭주하는 것일까? 난 중학생 때까지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난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정말 친한 친구 외에는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자발적인 아싸(아웃사이더)였다. 심지어 이성 친구와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은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되었을까? 


 8살에 엄마가 집을 나가고 거의 7년쯤이 흐르고 중2가 되었을 무렵, 막내 외삼촌을 통해서 엄마의 소식이 전해졌다. 난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보고 싶었지만 대구에 있는 다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아버지가 전한 엄마의 근황 소식과 더불어 엄마를 혹시라도 만난다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때문에 난 엄마를 만나는 것에 대한 생각 자체를 닫아 버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삼촌을 통해서 엄마의 연락이 온 것이다. 나와 동생이 보고 싶다고. 어쩌면 문제가 있는 남편 손에서 자라고 있는 나와 동생을 구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외삼촌에게 아주 냉정하게 거절했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있어서 엄마를 만날 수가 없다는 말로. 차마 엄마에게 아버지가 만나면 죽인다고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거기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난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외삼촌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겁먹어서 그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분노한 외삼촌은 아버지에게 가서 따졌다. 왜 애들이 엄마를 못 만나게 하냐는 내용으로 말다툼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더 좋지 않았다. 난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맞았다. 왜 맞는지도 모르면서 맞았다.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왜 엄마를 만나지 못하게 했을까?

 첫 번째는 그 당시에 함께 살고 있는 새엄마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주 젊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감추고 있던 아내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그 새엄마 앞에서 친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엄마를 만나면 자신의 부정적인 면들이 모두 드러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엄마는 대구에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 다방에서 일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100% 잘못해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아 있는 우리에게 100% 엄마의 잘못으로 이야기했다. 바람은 자신이 피워 놓고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했고, 다방에서 일한 적이 없었지만 예전에 일했던 다방으로 다시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항상 그랬다. 불합리하고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난 그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폭력부터 사용했다. 부드럽게 말을 할 때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그랬다. 그 외에는 일단 때리고 시작한다. 어떤 상황이 되든 아버지와의 대화는 무서운 시간이었고, 난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했다. 말대꾸도 불가능했고 논리적이든 상황적이든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사느냐고 말을 할 수 없었고, 새엄마가 오는 것도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와있었고 난 그 사람에게 엄마라고 불러야 했다.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말하는 것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말을 해야 간신히 해결되었고, 아버지에게 돈 얘기를 해봤자 해결되지 않았다.  


 내겐 이런 강박관념이 있다. 어떤 의견을 이야기할 때 강하고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인가 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몇 개의 책을 찾아 읽어 보면서 그것이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여러 증상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을 듣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몸에 미세하면서도 약간의 발작 초기 증상 같은 긴장감이 급속도로 올라온다. 스트레스 반응이 민감해져서 일종의 불안증과 과다 경계의 증상들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런 반박이나 행동을 하지 못해서 벌어진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불이익과 피해의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인 것 같다.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의 내 성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시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까? 분명하게 난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내 입으로 말해야 했다. 새엄마가 오더라도 내 의견을 물어봤어야 했다고 말해야 했다. 아버지가 폭력을 사용하고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보육원에 강제로 나와 동생을 보내려고 했던 아버지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해야 했다. 자식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사용하고 심지어 할머니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라고 강하고 확실하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성인이 되어가면서 난 심각할 정도로 공격적이 되어 버렸다.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강력한 단어와 어휘를 동원해서 상대방을 제압해야 했다. 내가 이기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엄마를 만날 수 없고, 다시 새엄마를 만나야 하고 보육원에 버려질 수도 있으니깐. 그렇게 제압하지 않으면 난 다시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깐. 


 그렇게 어린 시절을 핑계 삼아서 내 모든 성향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렀고, 내겐 그렇게 내 삶을 움켜쥐고 제압하려는 실질적인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와는 연락을 끊었고 -  이 부분을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 난 이제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어떤 대화 상대도, 나와 관련된 그 누구도 날 제압하거나 위협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냥 의견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생각이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살아오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지배했던 것 같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왜 저렇게 생각하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

 그 생각의 기본적인 바탕은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름에서 그치지 않고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매번 다짐하고 다짐해도 쉽지 않은 생각이다. 난 여전히 나와 다름에 대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방어한다. 어쩌면 공격이 목적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들 하니까.


 하지만 이젠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인간관계는 공격과 방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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