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이와 놀아주는 것보다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딸아이가 와서 조른다.
"아빠, 나하고 놀자."
"나 책 읽고 있잖아."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계속해서 아이가 조른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막 내용이 재미있어지는 참이었다.
"아빠 책 읽고 나중에 놀자."
다시 한번 거절하자. 딸아이는 토라졌다.
"치, 아빠는 나하고 놀기 싫은 거지?"
"그런 거 아닌데, 아빠는 지금 책을 읽고 싶어서 그런 거야. 책 좀 더 읽고 놀아줄게."
"아빠는 나보다 책 읽는 것이 더 중요해?"
단골 대사가 등장했다. 그래서 난 답해줬다.
"너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고, 너와 노는 것보다 중요하긴 하지."
그 말이 더 서운했나 보다.
"헐, 아빠는 나하고 노는 것보다 책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래서 난 정확하게 대답해줬다.
"그럴 수 있지. 너도 아빠가 책 읽는 것보다 네가 노는 것이 더 중요해서 지금 놀자고 하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는 더 기분이 나빴나 보다.
"흥, 칫, 뿡~"
그러고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는 아이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빠가 항상, 언제나 놀아주지 않는 것은 아니냐는 말을 해주었다. 충분하게 서운할 수는 있지만 아빠가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줬다. 심지어 친구들과 놀 때에는 아빠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니까. 난 매정한 아빠일까? 매정까지는 아니어도 냉정한 아빠일까?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을까? 그걸 어떻게 숫자로 정해서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한도 끝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걸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아이가 원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방법과 부모가 원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겠다. 아이가 원하는 놀이로 놀아주고,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먹고, 반대로 부모가 원하는 놀이를 아이에게 제공하고, 부모가 원하는 음식을 아이에게 먹이는 것처럼 말이다. 둘 다 사랑이다. 어느 한쪽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두 가지 중의 어떤 한 가지만 선택해서 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선택해서 할 것이다.
무작정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선택을 잘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작정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도 역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건 사랑이나 양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아이의 성향과 인격에 대한 존중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에 딸과의 대화를 써 놓은 이유는 그런 차원이다. 매번 딸아이가 함께 놀자고 할 때 매번 내가 위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는 아이와 함께 노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하게 중요하다. 놀아주지 않아서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를 아이에게 경험시켜줄 수 있다. 첫 번째는 거절을 경험하는 것이다. 거절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면 나중에 학교에 다니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 거절로 인한 좌절을 겪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상대방의 삶에 대해서 존중하려면 자기 자신의 삶의 영역에 대해서도 존중과 자립이 필요하다. 부모의 삶이 모두 아이를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아이의 삶도 부모와 함께 하는 것으로만 맞춰지는 것도 곤란하다.
'아이와 놀기 싫어서 무슨 말장난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것을 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서 아이와 놀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이런 방향성을 강요하거나 진리처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그것을 공급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애착관계가 아주 커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분리불안증은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너무 붙어 있어서 생기는 일종의 불안증 아니던가? 아이는 그렇게 내가 애착 인형처럼 애지중지 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히 다루면서 지켜야 할 도자기는 더더욱 아니다. 아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한 인간이고 인격이다.
더불어 부모도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꼭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본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하지 않아도 아이는 잘 성장한다. 부모가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이 아니라 혼자서 잘 서있고 원하는 바를 도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도 당연하게 그런 모습을 배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단 아이가 책 읽는 것은 좋아한다. 물론 게임도.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상황이 역전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함께 하자고, 놀아달라고 말하겠지만 아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걸 대비해서 준비하라는 차원이 아니다. 각자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생각하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자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