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행위 예술, 퍼포먼스 (performance)의 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질문이 오른다. 사람들의 폭력성은 어떻게 통제되는가, 개인은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알게 된 계기는 2010년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모마 (MoMA)에서 열린 그녀의 회고전 때문이다. <예술가는 여기 있다, The Artist is Present >라는 제목 아래 3개월간 매일 7시간 동안 앉아 낯선 관람객과 눈빛만 마주 보는 행위 예술이었다. 당시 64세의 그녀는 조건 없는 만남과 경청, 응시로 관객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눈빛을 통해 거울처럼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고 숨겼던 감정을 쏟아 낸다. 눈빛 나누는 기회가 점점 줄어만가는 세상, 그 안에서 오고 가는 무수한 감정이 그립고 흥미로웠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과격하기로도 유명했다. 그 대표적인 초기 작품은 <리듬 0 , (Rhythm 0)> (1974)이다. 테이블 위에 빗, 음식, 총, 장미, 채찍 등 72개의 다른 사물을 두고 관객에게 자유롭게 선택하여 마리나의 몸에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했다. 6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몸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맡겨 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마리나의 몸에 다가가는 것을 망설였고, 그다음엔 친절한 허그와 스킨십이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반응은 과격해지기 시작한다. 장미 가시로 상처를 내기도, 옷을 벗기기도 하고, 심지어 총으로 마리나의 이마를 겨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국 그녀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에 의해 공연은 중단되었다.
신체를 이용한 가학적 퍼포먼스를 보는 것은 너무도 불편하다. 폭력성이 드러는 것이라면 될 수 있으면 모든 매체를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조금 더 눈을 뜨고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 어떤 보호막 없이 사람들 앞에 드러난 신체는 한없이 나약했다. 그 나약한 신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폭력성이 가히 놀라웠다. 그 폭력성 안에 그녀를 구하려는 사람도 있고, 더 폭력적인 형태로 그녀에게 가혹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치 판단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가정하에 드러난 사람들의 폭력성과 그것을 막아서는 사람들.
질문이 떨어진다. 이 순간 이 폭력성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가치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인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폭력성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닌 질문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처럼 질문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도 섣부른 질문으로 다른 이를 귀찮게도 할 수 있다는 불편함이 있어 질문을 던지기까지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두른다. 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부교수 김 헌을 통해 '질문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만났다. 최근에 꼬리를 문 질문을 내어놓은 때는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다 보니,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까지 가 닿았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질문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질문을 하게 될까?
질문이 많은 사람을 유난하고 유별하다는 눈총으로 쏘아보는 한국 사회에서 질문을 내어놓는 일은 참 부담스러운 행동이다. 웃기고 슬픈 예가 떠오른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요청하는 짧은 비디오 클립이다. "질문 없나요?" 대통령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한 한국 기자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아챈 중국 기자. 이 짧은 영상 하나 만으로도 한국에서 질문을 던지는 일이 얼마나 어색하고 어려운 일인지 느낄 수 있다. 질문을 하지 못하는 기자, 하고 싶은데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 눈치를 보는 사람들 이것이 내가 살아온 질문을 대하는 환경이다.
세상에 옳은 질문이란 없다고 한다. 어떠한 질문이든 던져져야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에 어떠한 질문이라도 궁금증이 일면 던져야 한다. 자신의 삶에 질문을 갖는 일은 나다운 가치 판단을 세우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태도라 생각한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지식이 쌓이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질문은 솟아오른다. 아이들은 질문이 참 많다고 한다. 솟아오르는 질문을 내어 놓느냐 마느냐는 대부분 사회적 분위기, 눈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질문을 내어놓지 않다 보면 질문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질문과 궁금증은 삶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김 헌 부교수는 말한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얼마큼 있느냐에 따라 질문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다소 강한 어조로 말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갈 때 화수분처럼 솟아오르는 질문의 양을 생각하면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다. 삶에 애정 어린 시선과 마음이 있을 때 질문은 솟아오른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이 나와는 동떨어져 내 의지, 나다움과 상관없이 흐르고 있다는 위태로운 경고일 수도 있다.
쓰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질문은 중요하다. 애정이 묻은 질문은 일상의 각도를 약간은 틀어 새로운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게을러지기 쉬운 머릿속, 질문이라는 자극으로 자꾸 각도를 틀어보려 노력한다. 학교 공부처럼 주어진 질문에 답을 찾는 길이 아닌 스스로 질문을 먼저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부지런함을 갖고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를 궁금해하듯 그런 애틋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무엇을 만나든 그것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를 먼저 바라보는 시선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