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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Dec 08. 2020

런던으로 가는 길

2020년 8월 27일 : 글쓰기 58일 차, 


여름 3개월 동안 말기암 수술을 마치고, 항암 치료를 시작하신 엄마 병간호 중간에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 비행기 안에서 마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적어 내려간 글이다. 아직도 코로나에 여행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 한적하다. 터미널 2, 예상보다 훨씬 더 조용한 공항을 마주하고, 아빠와 난 사람 없는 공항이 무척이나 낯설다는 대화를 나누며, 체크인 데스크를 향해 걷는 중이다. 대한 항공을 타고 런던으로 간다. 보딩 패스를 받기 위해 승무원 전용 체크인 카운터로 향한다. 직원이 어디로 가느냐 묻는다. "런던이요". "혹시 런던 입국을 위한 방역 서류는 작성하셨나요?" 링크는 미리 받아 두었는데 나중에 해도 되는 줄 알고 미뤄두었다. 그것을 작성했다는 확인 없이는 보딩패스를 줄 수 없다고 한다. 없던 일이다. 옆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링크를 따라 서류를 작성한다. 영국 정부에서 해외 입국자들에게 요구하는 서류다. 코로나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에는 여행지, 여행기간, 영국에서 거주할 곳, 함께 거주하는 사람 그리고 자가격리가 필요한지 여부를 묻는 내용으로 꽤 많은 질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런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너무 많은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기분이다. 어쩐지 꼼짝 말라는 듯한 느낌이어서 좀 불편하다.


그렇게 서류 작성을 마치고 창가 쪽 자리 보딩 패스를 받아 들었다. 아빠는 아직 시간도 많으니 커피라도 한 잔 같이하고 들어가라고 하신다. 아니, 오늘은 왠지 어서 들어가고 싶다. 공항 오는 길에도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눈물이 솟아 올라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아빠, 오늘은 그냥 들어갈게요."

"들어가 봤자 그냥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데 커피 한 잔 하지 그래."

"그냥 갈게요. 아빠랑 더 있으면 나 진짜 이번엔 런던에 못 들어갈 것 같아 그래요."


그렇게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아빠 눈을 쳐다보니, 아버지는 이미 울고 계신다. 오늘따라 마음이 더 감정적으로 흐른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다 꿈만 같다. 정신을 더 부여잡는다. 공항 직원에게 전에 없던 질문을 받는다.


"마스크를 30개 이상 가지고 가세요?"

"네"

"그럼 저쪽 세관 신고하는 곳에서 마스크 신고하고 가셔야 해요."


세상이 이상하다. 세관 신고하는 곳에서 마스크 개수를 신고하고 나가야 한다니.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 세관에서 현금 얼마를 가져가느냐 질문은 받아봤어도 마스크 개수를 신고하기 위해 줄을 서는 이 풍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다. 세관원은 마스크 150개 이상 가졌는지를 물었고, 난 아니다는 짧은 대답을 남겼다. 스티커 한 장을 기내 가방 손잡이에 붙여준다. 마스크가 생명줄처럼 되는구나, 경제적으로 취약층에 속한 사람들이 버려진 마스크에 의존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기사가 떠오른다. 마스크 없이 바깥출입이 불가능한 세상이 오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귀찮은 순간이다. 노트북을 내어놓고, 가방을 모두 바구니에 담아 검색대를 통과한다. 그리고는 자동 출국 심사대에서 여권, 지문, 얼굴인식을 마치고 보딩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밤 비행기 탈 때보다 더 조용한 풍경이다. 오늘 비행에 승객은 60% 정도가 찼다고 한다. 다른 날보다 다소 많은 승객수라고 한다. 9월 학기 시작 때문인지 학생도 꽤 있고, 어린아이를 둔 가족들도 제법 눈에 띈다.


면세점을 채운 브랜드 세일 홍보가 무색하다. 승객 수보다 더 많은 직원 수, 그들의 눈동자가 내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남편이 좋아하는 카스텔라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빵집이 없다. 터미널 2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은 처음이다. 여기도 당연히 빵집이 있을 줄 알고 사두는 것을 미뤘는데 낭패다. 카스텔라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미안하다. 석 달이나 혼자 있었는데... 아쉬운 대로 그가 좋아하는 초콜릿 세트를 사 둔다.


236 게이트 앞에 앉아 있으려니 엄마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잘하고 있다가 시월에 다시 보자고 했는데, 그 깡 마른 몸이 자꾸 아른거린다. 아빠는 오랜만에 바깥 구경하니 마음이 뚫리는 기분이라고 하셨다. 이제 엄마와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 다니면서 바람 좀 쐬어야겠다고 말씀하신다. 공항으로 오던 길 햇살에 부서지는 강물을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이 공허하다.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자. 이번 비행은 하루키와 함께 하려고 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이다. 시간이 얼추 남아 읽기 시작한다. 건강한 일상이다. ‘선택사항으로서의 고통’이라는 서문 제목이 마음에 든다. 고통을 선택하여 매일 실행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금세 하루키의 글로 빠져든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반복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문장도 참 좋다. 마음을 단련하고 수련할 때 매일 청소와 주변 정리 등 작은 일생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지금, 이것도 반복되면, 무언가 우러날 것이라는 확신은 이제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다. 다시 만난 기내가 반갑다. 승무원들은 반투명 하얀 우비 같은 것을 유니폼 위에 입었고, 고글과 마스크 그리고 장갑으로 무장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비슷한 복장으로 일하던 내 모습이 교차한다. 그때는 비행기에 올라 홍콩으로 가는 길이 두려웠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는 동료들과 승객들을 마주하는 게 너무 낯설어 심장이 뛰기도 했는데… 이제 이 모든 게 눈에 익다. 적응이 빠른 것도 사람이다.


모자란 잠을 자려고 창가 쪽 자리를 원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하고 잠을 청한다. 기내식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4-5시간을 뒤척여가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래도 잠을 좀 잤더니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하루키의 달리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잊고 있던 일상이 떠오른다. 서울로 오기 전, 남편과 달리기를 시작했다. 3월부터였으니, 약 두 달간 일주일에 두서너번을 함께 뛰었다. 그도 작년부터 달리기에 뜻을 두고 뉴욕과 런던 그리고 서울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두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나도 다시 달리고 싶다. 수다쟁이 남편 벗 삼아 쉴 틈 없던 수다와 함께 달리던 그 순간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 원고용지 한 뭉치, 1000엔 정도의 만년필 한 자루를 사서는 바로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400자 원고지 200매를 쓰고는 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했다. 그것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행동력을 배운다. 마음을 세우고 봄, 여름, 가을 꼬박 글을 써 문예지에 원고를 보냈다니… 망설임이 많은 난, 그의 재빠른 행동력이 갖고 싶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조금만 덜 망설여 보기로 해본다.


서울-런던으로 오가는 이 11시간을 잘 보내보려 항상 애를 쓴다. 처음엔 이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해 비행기 타는 게 끔찍이 싫었다. 그래서 좀 더 한국과 가까운 나라로 이주해 볼까 고민한 적도 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일만 아니면 해외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 굳어지는 마음이 아닌 액체 같은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기에 고단해도 지금은 해외 나와 사는 게 맞다. 몇 년 전부터는 긴 비행시간을 은근히 즐기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은 두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터뷸런스로 가끔씩 움직이는 기내, 백색 소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서 주변 승객들만 친절히 조용하다면 책을 읽거나 쓰는 것 혹은 영화를 집중해 보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그래서 기내에서 읽을 책은 좀 신경을 쓴다. 재미도 중요하지만 평소 읽기 어려워하던 책을 가지고 탈 때도 종종 있다. 의외로 집중이 잘 되는 공간이다. 또 다른 하나 영화, 보고 싶던 최신작이 있다면 그것 먼저, 그 후에는 고전 영화로 최소 두 편의상 챙겨 본다. 이미 본 것이라도 상관없다. 흑백 영화라도 좋다. 역시 집중이 잘 된다. 대사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니. 또 다른 방법은 시리즈물을 한꺼번에 시청하기도 한다. 두어 번 해 봤는데 7~8편의 시리즈를 연속해 보고 나면 어느덧 랜딩이다. 이것만큼 시간 잘 가는 것도 없다.


이제 한 4시간 정도만 더 가면 도착이다. 런던 시간으로 저녁 5시 20분 경이될 것이다. 남편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 집에 가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샤워하는 동안 그는 저녁 준비를 하겠지. 내일은 휴무를 내었다고 하니 둘이 어디 나가 그렇게 그리던 브런치라도 한 끼 나눠 볼까 한다. 분명 커피를 마시며 설탕 한 스푼 때문에 넣지 마라, 한 스푼도 안되니 괜찮다 옥신각신 입씨름을 할 게 분명하다. 


히드로 공항 터미널 2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그의 얼굴을 찾아본다. 해님처럼 방끗 웃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서 보인다. 아, 왔구나. 한동안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한다. 그 길도 한적하다. 퇴근시간인데 짝꿍이 조용한 길로만 운전을 해서인가?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인가? 


초록이 무성한 길에 안정감을 느낀다. 오랜만인 그의 수다도 참 듣기 좋다. 깔끔하게 정리한 집을 보며 고맙다 인사한다. 혼자서도 잘하고 있었나? 아님 나오기 직전에 폭풍 청소를 했나? 뭐라도 상관없다. 집에 돌아왔으니. 파스타 한 그릇 후다닥 해치우고, 잠자리에 들면 된다. 걱정 많던 그 길을 또 이렇게 잘 마쳤다. 깊이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런던 집에 오니 지난 시간의 기억이 다 꿈만 같다. 

아,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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