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라희 Oct 30. 2022

답은 내 안에 있다

2020년 9월 24일 86일 차, 


사는 게 더 팍팍하게 변해가는 런던 생활을 접하며, 무기력감과 귀찮음이 몰려오는 마음을 추스르고자 여전히 글을 써 내려갔다. 귀찮음과 회피 대한 감정을 깊게 고민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글을 쓰던 날의 기록이다. 




밤 새 내린 비에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어제는 무기력감이 몰려오는 마음을 글로 써 놓고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오늘은 부지런을 좀 떨었다. 괜히 이불보도 갈아보고, 밀렸던 책 읽기도 한 권 끝냈고, 연락을 미루던 사람들에게 안부인사도 해두었다. 아침 산책길 찬 공기와 파랗게 밝아오는 하늘을 만나고 있자니 가을이 더 느껴진다. 봄 보다 가을을 더 타는 사람에게 이 계절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집에 돌아와 당근 하나, 사과 하나 썰어 먹고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려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제는 분주한 움직임 속 귀찮은 감정을 생각해 봤다. 이 감정이 오를 때마다, 잘 굴러가던 일상이 잔가시에 걸린 듯하는 일은 귀찮음의 딴지에 계속 걸려 넘어진다. 이 귀찮음이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다양한 삶의 색채도 하나 둘 빛을 잃어가는 듯하다. 이 귀찮음의 근원은 무엇인가 따라가 보려 해도 어제는 내내 그 딴지에 걸려 생각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엄마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침대 속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회피라는 단어가 귀찮음과 연결된다. 맞다 회피. 귀찮은 감정을 쓰고 숨어 있던 감정은 회피가 아닐까?


인터넷을 서핑하기 시작했다. '몸을 피하고 만나지 않는 것, 꾀를 부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아니함, 일하기를 꺼리어 선뜻 나서지 않음을 뜻'하는 회피, 팔 걷어 붙이고 힘껏 나아가야 하는 순간마다 발목을 붙잡는 이 감정, 회피. 이 감정 때문에 놓친 중요하고, 귀한 순간은 얼마나 될까? 살면서 난 회피라는 단어에 꽤나 자주 발목을 잡혔다. 이건 자신감과도 붙어있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도 공존한다.


런던에서 살면서 채근을 일삼고, 더 잘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던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과 만나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솔직한 말 따위는 내 안에 넣어두고 혼자만 알아도 되는 것일 텐데...  더 이상 이 회피가 내 발목을 잡는 일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어 본다.


꽤나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관념적으로 상황에 대한 정리와 이해가 완전히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영어 공부할 때는 책을 꼭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야 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어디서 어떻게 만날 지를 꼭 미리 다 머릿속으로 완벽히 계획을 세워 놓아야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 성향이 게으른 천성과 만나면 그야말로 내적 괴리가 말도 못 하게 커진다. 그 괴리의 간격 속에 채근과 자책이 쌓이다 보면, 인간의 본능은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 핑계를 어떻게라도 찾게 된다. 그것이 회피와 귀찮음이라는 감정이지 않았을까?


도전을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도전보다 안정의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할 때도 예전에는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면, 이젠 과거의 경험을 들춰낼 수 있는 곳으로만 가려고 싶어 진다. 나이가 들어가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경험된 회피와 귀찮음이라는 감정이 새로운 곳으로의 도전을 자꾸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며칠간 생겼던 불안의 감정이 귀찮음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은 지금부터는 예전과 같은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음을 머리보다 마음의 심연 어느 곳이 먼저 느끼고 보낸 신호처럼 느껴진다. 이제 진짜 다른 도전을 위한 시간이 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움직이라고 말하는 내 본능의 소리다.


그 소리는 불안으로 느껴졌고, 그 느낌은 경험된 회피로 자리를 틀면서 귀찮음을 통해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 다시 현실을 회피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 잘못된 위로를 건네며... 오늘도 실직과 정부 보조에 대한 뉴스로 인터넷이 떠들썩하다. 남편이 근무하는 대학도 35% 정도의 인원 감축을 얘기했다. 불안하다. 삶의 고비마다 나를 일으키고 세워준 건 믿음이다. 나에 대한 믿음, 함께 결정을 내리고 같이 걸어가는 가족에 대한 믿음. 깊은 마음 어딘가에서 들려주는 불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팔을 걷어 올리고, 움직여 보기로 한다. 언제나 답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이전 12화 런던으로 가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