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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Oct 30. 2022

완벽하지 않은 날

2020년 8월 7일, 글쓰기 38일 차,


엄마는 13시간의 수술 후 3주간 입원 생활 마치고, 퇴원을 하루 앞두고 있다. 3개월 간 서울 생활도 끝을 향하고, 다시 런던 돌아가 일상에 적응할 걱정에 쉬고 싶어도 쉴 수 마음을 달래 보려 적어 내려 간 글이다.




유난히 머리가 무거워 하루 종일 대놓고 게으름을 피우는 중이다. 엄마 퇴원은 내일이고, 다음 주에는 항암을 위해 재입원을 해야 하니 오늘은 작정하고 좀 쉬자 싶다. 그런데 이 와중에 런던으로 돌아갈 날이 고민으로 딸려온다. 좀 쉬자 싶었는데 그것도 맘처럼 쉽지 않다. 서울 이곳은 고향이니 마음 놓고 널브러져 있어도 세상 가벼운 마음으로 쉬다갈 수 있는데, 런던 거기는 아니다. 현실적 일상이 눈앞에 매일 놓이는 곳, 골머리를 거의 매일 써야 하는 곳,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매일인 곳, 그곳이 런던이다.


아침에 커튼을 열면 회색 하늘이 거의 매일이다. 이번엔 구월이나 되어야 들어갈 것 같으니 감감한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구나.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가랑비에 우산 쓰기도 어정쩡하고 그저 부스스 맞으며 다니는 날이 많아지겠구나. 런던 날씨에 대한 불평만 내어만 놓아도 오늘치 글쓰기 분량은 거뜬히 채울 수도 있겠다.


영국 서남쪽 끝에는 콘월이라는 지역이 있다. 컬트 해와 영국 해협을 바라보는 그곳의 겨울은 매운 바닷바람과 흩뿌리는 비에 우비 없이 걷기 힘든 날이 거의 매일이다. 어느 해 1월 1일, 남편과 나는 그곳으로 새해맞이 여행을 떠났다. 한 겨울에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만나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 보자는 남편의 무모한 바람 덕분에 우리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콘월의 바람을 맞으러 떠났다. 저녁에 도착해 하룻밤 자고 일찍 일어난 우리는 희뿌연 안개와 짠물 먹은 바람이 일렁이던 그곳의 풍경을 산책하고 있었다.


"자기야 다 좋은데... 이곳에 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렇지, 바람 너무 쐬다. 자연은 좋은데 너무 거칠다, 매일 살기엔..."

"응 여기 사람들은 이 바람을 어떻게 견디며 살까? 빨리 가자, 너무 힘들어."


이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돌아 걸어가는데, 골프클럽이 보인다. 자동차 서너 대가 방금 엔진을 끄고, 주차한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세 명의 남자가 튼튼한 우비를 입고 골프채를 둘러맨 채, 골프를 치겠다 온 게 아닌가. 이 날씨에, 이 바람에, 이 아침에!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래, 맞다! 이게 영국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오늘 우리가 제대로 보고 가는구나.


완벽하지 않다고 미루는 일은 없다. 날씨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삶을 미루다 보면 영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완벽에 집착했던 삶이 가장 큰 실수였음을 그 땅 영국에 가서 피부로 배웠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준비를 위한 시간만 보내느라 시작도 못한 일은 부지기 수고, 완벽한 때를 기다리느라 미뤘던 일도 많다. 미루는 것이 삶이 되어버릴 뻔했다. 일단 주어진 것을 먼저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치우고, 움직이고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움직거리며 해야 진짜 살아지는 것, 그것이 완벽하지 않은 매일을 사는 법이었다. 그것을 런던에 와서야 옹골차게 배웠다.


여기에 완벽하지 않은 것이 주는 아름다움이 보인다. 차가 없을 땐 걸으며 런던 구석구석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이사를 자주 해야 할 땐 동네 곳곳을 돌며 그 특색이 주는 개성을 느낄 수 있었고, 일하느라 바쁠 땐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할 줄도 알고, 마음 줄 친구 없이 혼자 일 땐 고독의 시간에 사람은 커나가는 것 의지하며 홀로 시간을 즐기는 법을 배우고, 비가 오는 무수한 겨울밤에는 꽃을 꽂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법을 알아갔다. 완벽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순간들을 숨은 그림 찾듯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서울에 오게 되어,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런던의 완벽하지 않던 날들에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엄마와 손깍지 끼며 걷는 순간도 추억할 수 있게 되고, 부모님과 보내는 어려운 시간을 통해 몰랐던 두 분의 모습을 담아둘 수 있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들고, 그 와중에 남는 시간에 글을 쓰자고 덤벼들어 쓰기 시작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더 좋은 조건과 더 좋은 삶, 더 좋은 시간은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게 주어진 완벽하지 않은 날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내 삶이다. 비가 오는 회색 하늘이 매일이라고 오늘을 미루다 보면 지금은 영영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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