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서 살면 나도 철학자 되겠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시인의 '인연'에 이런 글귀가 있다. 여행지와의 인연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한 번 가보고 푹 빠져 그리워하는데도 다시 못 가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 안 가고 살기도 하는 그런 곳이 있다. 나에겐 하이델베르크가 그런 곳이다.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가지 않는 여행지 하이델베르크. 왜 그리워하게 된 것일까
쾰른에서 대성당을 구경한 뒤 열차 시각에 맞춰 역으로 돌아와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막 유럽땅에 발을 딛은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40일 중 약 10%에 해당하는 초반일정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에 기차 안에서 온몸이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하이델베르크에는 밤8시나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 작은 마을은 굉장히 구질구질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역에서 빠져나와 유스호스텔(이하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이내 거세지더니 '두다다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장대비를 땅으로 내리꽂는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대단한 환영식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역에서 숙소였던 게스트하우스까지 가는 버스 안이었다. 굵어지는 빗줄기에 우산은 없고 버스가 오자마자 정거장에서 잔뜩 움츠렸다가 기사님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용수철이 튕겨져 나가듯 펄쩍 버스 안으로 올라탔다.
버스 안도 바깥 날씨마냥 어두컴컴했고 버스 안 승객은 나를 포함 두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 8시에 이런 음침한 분위기라니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나 구글맵 등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때여서 GPS가 아닌 순전히 내 시력으로 위치를 확인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나 어두워서야 숙소 근처 정거장에 잘 내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안에 탔던 얼마 없던 승객들이 다 내렸는데도 숙소 근처 정거장은 보이지가 않았다. 홀로 버스에 남겨진 채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버스는 다시 정차했고 이번엔 기사님이 버스 앞 뒤 문을 다 열고 그대로 내리셨다. '무슨 일이지?' 당황하며 밖을 본 나는 거기가 곧 종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버스를 내려 기사님께 반대편 정류소를 물어봤고 기사님은 어두운 날씨만큼이나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손가락을 가리키셨다. 겨우 찾은 정류소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온 만큼이나 다시 되돌아와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숙소 근처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다.
정류장에 내리고 나니 도시에 불빛이 없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길을 지나 숙소 입구를 찾는데도 한참이나 헤매었다. 간신이 찾은 숙소 입구를 지나 숙소 카운터로 향한다. 대략 4~5명이 나란히 서서 손님을 응대할 수 있는 카운터엔 한 명이 야근당번 마냥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비에 젖고 피곤에 절은 내 모습을 보고 표정이 말을 건낸다.
이 시각에 웬 손님?
놀란 점원의 표정을 억지로 뭉게고 카운터로 다가가 간단하게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한밤중의 평화를 깨뜨린 여행객에게 점원은 그 순간 본인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간신히 끌어올려 방을 알려주고 중요 안내사항을 전달한다.
배정 받은 2층 방으로 가보니 시설이 완전 깨끗했다. 여행 중 마주친 모든 유스호스텔 중 내 맘 속 1~2위를 다툴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게다가 아무도 없어서 넓은 6인실을 혼자 쓸 수 있었다. 라고 착각했다. 다시 보니 한쪽 침대에 가지런히 양말 몇 개가 놓여져 있고 바닥에는 정체모를 슬리퍼가 널부러져 있었다.
목이 말라서 음료수 뽑아 마시려고 로비에 내려가서 음료수 자판기에 다다르니 ‘1.5유로 내놔’라며 자판기가 쏘아붙인다. 스프라이트를 마시려고 1.5유로를 투입하니 콰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떨어지긴 했는데, 꺼내보니 내 팔뚝만한 크기의 스프라이트 (유리)병인지라 깜짝 놀랐다.
전체적으로 호스텔에 사람이 없었다.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비수기라 그런건지는 몰라도 나한텐 좋다. 넓고 깨끗한 시설을 마치 혼자 쓰는 것 같아서. 새벽에 찾아온 내 방 손님을 제외하면 첫 날 밤은 굉장히 조용하고 편안히 잠들었다.
호스텔은 7시 30분~10시까지가 조식 시간이었다. 7시에 일어나서 호스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간밤에는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안보였는데 그 와중에 뭔가 주변에 있을 것 같아서. 호스텔 바로 옆에는 동물원이 하나 있었다.
규모는 커보이지 않았는데 입장료가 있어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입구 옆에 작은 볼거리를 마련해 놓아서 그거 좀 보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큰길 따라 5분 정도 계속 걸으니까 병원같은 것이 하나 나오던데, 거기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은 뷔페식이었다. 햄, 빵, 시리얼, 우유, 물, 주스 등을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먹으라는 식이었다. 나한텐 뭐 천국이지. 외부로 가져가는 것은 금지였으나 식당 안에서는 무한리필이 가능해서 배부를 때까지 계속 먹었다. 워낙 숙소에 사람이 없어서 식당도 꽤나 한산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중앙역을 지나 비스마르크 광장에서 내렸다. 간밤에 잠시 버스에서 내려서 반대편으로 갈아탔던 바로 그 곳이었다. 밝을 때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비스마르크 광장에서 그대로 하우프트 거리를 따라 계속 걸었다.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굉장히 맑아서 좋았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어서 한산했고. 그리고 ‘대학의 도시’라는 별칭에 걸맞게 여기 저기 대학건물들이 있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중간 중간에 보이는 작은 골목들이 어찌나 예쁘던지, 그리고 골목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네카강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대학 광장에서 조금 시간을 보낸 뒤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올라갔다. 성이 언덕 위에 있는지라 올라가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겉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성 안으로 들어가니 그 규모가 어찌나 크던지. 아무튼 성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은 돈주고도 못 살 그런 풍경이었다. 잠시 감상해보자.
성에서 내려다 본 하이델 베르크 시내는 그야말로 동화 속 풍경이었다. 우리나라는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 투성이일텐데(반대로 유럽 사람들은 이런 풍경이 이색적이겠지?) 대도시가 아닌 이런 작은 마을의 매력은 처음이었다. 이 때 부터 슬슬 하이델베르크의 혹은 작은 마을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성의 내부로 들어가본다. 겉보기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하이델베르크 성 안에는 자동차도 올 수 있구나. 힘들게 걸어왔더니 기운빠진 장면. 하이델베르크 성 곳곳은 무언가에 공격당해 무너진 성채가 군데군데 보였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에서 벌어진 개신교와 가톨릭 간 30년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성 안에는 괴테의 의자가 있다. 괴테가 여기에 앉아서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도 슬적 의자에 앉아본다. 그 옛날 괴테는 여기에 앉아 어떤 풍경을 보며 자신의 사상을 차곡차곡 쌓아올렸을까. 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 맞은편에 이상한 표정의 머리큰 아저씨가 야릇하게 누워있는 분수가 보인다.
성을 내려와서 철학자의 길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시내에서 철학자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네카강을 건너야 했다.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그 유명한 칼 테오도르 다리이고 나머지 하나는 알 수 없는 듣보 다리다. 처음에는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갔다.
하이델베르크의 거리. 평범하지만 뭔가 굉장히 멋스럽다. 이후 예쁜 소도시를 많이 돌아다녔지만 첫 기억이 오래간다고 하이델베르크에서 봤던 골목 풍경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큰 길 외에도..작은 골목 골목 들어가면 아기자기하고 보석같이 예쁜 공간과 마주친다.
테오도르 다리를 아래에서 본 모습이다. 거대하지는 않지만 뭔가 웅장함이 느껴진다. 훗날 방문할 프라하 카를교와 닮아있다. 시내는 어딜가든 하이델베르크 성이 보인다. 겉모습도 많이 낡아있다. 보수공사도 한창 진행중이었고(10년 전 기준)
나중에 프라하에 도착하고 느낀 건데 하이델베르크의 네카강 풍경과 프라하의 볼타비타강의 풍경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이델베르크의 느낌이 더 좋았다. 고요하고 인적도 드물고 홀로 평화롭게 거닐기 여유롭다.
그 여유를 즐기기 위해 잠시 네카강 강가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조금 쉬고 칼 테오도르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갔다. 하이델베르크 성, 하이델베르크 시내,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네카강.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작고 예쁜 소도시의 매력을 처음 느낀 하이델베르크.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원래 철학자의 길로 올라가는 정확한 루트를 몰랐다. 그래서 대충 감으로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하늘이 흐릿흐릿한 것이 곧 비가 내릴 것 만 같았다. 철학자의 길 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중간에 비가 와서 옷이 젖으면 난감할 것 같아서 그대로 다시 강을 건너서 시내로 돌아가 3유로짜리 우산을 사고 다시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테오도르 다리가 아니라 이상한(?) 다리로 강을 건너게 되었고 철학자의 길 입구가 아니라 정체 모를 오르막길로 걸어가게 되었다. 가도가도 철학자의 길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고 자꾸 산 속으로만 들어가는 게 안 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일단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좁은 산길은 가파르게 위로 향했고 인적은 드물다 못해 아무도 없고 혼자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중간에 커다란 개와 함께 산을 오르던 어떤 아주머니를 제외하면 30분 올라가면서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갈림길이 보여서 왼쪽과 오른쪽을 저울질 하던 중 왼쪽으로 갔는데 lucky. 쭉 따라가다 보니 철학자의 길이 나와버렸다. 정말 고생고생 해 가며 찾아서 그런지 거기서 보이는 하이델베르크 풍경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그리고 길 자체도 너무 예뻤다.
산 중턱을 가로로 질러가는 길다란 길인데 산책 코스로도 조깅 코스로도 딱 좋아 보였다. 실제로 20여 분을 걷는 동안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오갔다. 시간이 없어서 끝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꽤나 길게 이어진 길이었다.
중간 중간 마주친 어여쁜 풍경들과 숲속 산책길. 공기는 정말 맑고 고요했다. 철학자의 길의 유래는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칸트의 산책로가 유력하다고 한다. 철학자에서 내려다 본 칼 다리와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보다 보니 없던 철학사상도 생길 것만 같았다. 이 풍경이 괴테를 비롯한 독일의 위대한 시인과 철학자를 낳은것이겠지.
가끔 '개인의 재능은 그가 자란 환경에서 기인했구나'를 느끼게 하는 장소가 있다. 남프랑스 여행을 갔을때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따사롭고 보드라운 햇살을 느끼며 이런 풍경을 보고 자랐기에 위대한 화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여기 철학자의 길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려갈 때에는 철학자의 길 입구 쪽으로 제대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도 고생이었는데 내려 가는 것도 고생이었다. 이러니 자연스레 철학적인 생각이 떠오를 수 밖에. 원래 고통속에 사상이 싹트는 법.
테오도르 다리 위의 거대한 구조물을 지나 어느 교회에 들어가 타들어가는 촛불을 보며 잠시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달래본다. 소원과 염원이 담긴 초. 누군가의 간절한 바램이 꼭 이루어지길..
철학자의 길을 내려오니 자연스레 배가 고파왔다.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저렴한 학생 식당을 찾아봤지만 시간이 늦어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다른 학생식당을 찾던 중 아주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저녁 늦게까지 하는 것 같았고 부페식 식당에 g단위로 값을 매겼다.
100g당 1.5 유로기에 굉장히 싸보여서 배고픈 마음에 이것 저것 다 접시에 담았는데, 아뿔싸..가격이 7유로나 나와버렸다. 값싼 학생식당에서 7유로..계산대에서 내 뒤에 있던 학생들이 조심스레 수근거린 이유가 있었다. 아무튼 배부르게 먹은건 사실이니까. 아주 무식한 행동이었지만.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밤 늦게 돌아가니 숙소에 어제 밤 손님 외에도 두 분이 새로 들어와 있었다. 내가 중간 탁자에 앉아서 일지를 좀 쓰려니까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해줬다. 나이는 50대 중반이고 미국에서 왔고 도축업을 하다가 은퇴했다고 말했다. 근데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한 후 다짜고짜 오바마에 대해 묻는다. 정치에 대해 관심 없어진 지 오래였는데. 그래서 간단하게 내 견해를 밝혔지. ‘positive’ 그러더니 한국의 대통령은 어떠냐, 경제상황은 좋더냐 이것 저것 묻는데 참..골치 아팠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프랑스 니스와 더불어 여행 전부터 굉장히 기대했던 도시였다. 가이드 북에 나온 설명과 사진을 보니 딱 내 취향인 도시였다. 마을이 크지 않고 조용하고, 강이 있고, 산이 있고, 학구적으로 보이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도시였다. 숙소도 마음에 들고, 아침 식사도 환상적이었고, 철학자의 길도 예뻤고, 학생식당에서의 뻘짓과 버스에서의 챙피함만 아니었으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도시였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글도 사진도 by lai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