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잊어도 마음은 남잖아요."

--- 재활용센터 봉사자 경숙의 토요일---

by 월화수 엔 Jane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침

토요일 오전 8시 30분.

경숙은 재활용센터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어젯밤에 또 그런 일이 있었다.

냉장고 앞에 서서 뭘 꺼내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

요즘 자꾸 이런 일이 있었다.

며칠 전에는 큰아들 이름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아서 당황했다. 석... 석환이. 맞다.

혼자 사는지 팔 년째. 말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일찍 오셨네요."

뒤돌아보니 그 젊은 봉사자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오는... 이름이 뭐였지? 미... 미뭔가였는데.



조금씩 드러나는 문제

"할머니, 이거 어디에 넣어야 해요?"

그 애가 손에 든 건 편지 묶음이었다.

"편지는... 어디에 넣더라?"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매주 하는 일인데,

갑자기 헷갈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종이 함이요. 할머니가 저번에 알려주셨잖아요."

"아, 맞다. 종이함."

그 애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경숙은 괜히 화가 났다.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 싫었다.

점심시간엔 더 심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여기서 몇 년째 일하고 있는데.



무서운 깨달음

집에 가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집을 찾았다.

이제 정말... 그런 병이 시작된 건 아닐까. 엄마가 그랬듯이.

경숙은 생각하기 싫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몇 년을,

그 텅 빈 눈빛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열쇠를 넣으려다가 손이 너무 떨려서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조용한 도움

다음 주 토요일. 경숙은 그 애의 이름을 또 까먹었다.

"그... 미안한데, 네 이름이..."

"미희예요. 미희."

미희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대답해 줬다.

하지만 10분 후에 또 까먹을 것 같았다.

신기한 건, 그날부터 미희가 자연스럽게 도와줬다는 것이다.

"할머니, 아까 보신 편지 정말 예뻤죠? 색연필로 그린 꽃 그림."

"어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편지요. 군인 아들이 보낸."

미희는 경숙이 잊을 때마다 조용히 기억을 되살려줬다.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새로운 방법

며칠 후, 미희가 작은 수첩을 가져왔다.

"할머니, 이거 어때요? 우리가 읽은 편지들 간단히 적어두는 거."

"왜?"

"그냥... 나중에 다시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수첩을 보니까 신기했다. 기억나지 않던 편지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아, 이거. 이 편지 읽었을 때 내가 울뻔했지."

"맞아요. 할머니가 그때 정말 감동하셨어요."



어느 날의 고백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따라 경숙의 손이 더 많이 떨렸다.

편지를 읽다가 같은 문장을 세 번이나 읽었는데도 무슨 내용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희의 이름을 세 번이나 물어봤다. 똑같은 질문을.

미희는 매번 웃으며 대답해 줬지만, 경숙은 자신이 무너져가는 걸 느꼈다.

작업이 끝나고, 경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미희야..." 목소리가 떨렸다.

"나... 나 정말 이상해. 요즘 깜빡깜빡하는 게 아니라... 네 이름도 자꾸 까먹고,

어제 뭘 했는지도 기억 안 나고... 집에 가는 길도 헷갈리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혹시... 혹시 내가 그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치매 같은..."

그 순간 경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울지 않던 사람이, 남 앞에서 우는 건 처음이었다.

"미희야, 나 정말 무서워. 내가 나인지도 모르게 되면... 그럼 어떻게 해?"

미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경숙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제가 아버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잖아요.

근데요... 아버지가 저를 사랑했다는 건 기억나요.

정확히 뭘 해줬는지는 몰라도, 사랑받았다는 마음은 남아있어요."

"할머니도 그럴 거예요. 기억은 잊어도... 할머니가 누군가를 아끼고,

누군가에게 아껴받았던 그 마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가 잊으면, 제가 기억해 드릴게요."



작은 편지

그날 미희가 작은 편지를 건넸다.

"할머니께, 할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들 잊지 않을게요.

할머니가 까먹어도 저는 기억할게요.

할머니가 처음 저를 반겨주셨던 때, 편지 읽으며 따뜻하게 웃으셨던 모습...

그 모든 순간들을 제가 간직할게요. 할머니는 혼자가 아니에요."

경숙은 편지를 보며 눈물이 났다.

"미희야... 정말 고마워."

"할머니가 저한테도 많은 걸 주셨어요.

할머니가 제 이름을 불러주실 때마다...

누군가 저를 기억해 준다는 게 이렇게 따뜻한 일인지 처음 알았어요."

이번엔 이름을 잊지 않았다. 미희. 소중한 미희.



예상치 못한 이별

하지만 몇 달 후, 미희가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저... 이사하게 됐어요."

"언제?"

"다음 주에요."

"그럼...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경숙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무서워졌다.

"할머니, 제가 가도 할머니는 괜찮을 거예요. 할머니는 혼자가 아니에요."

미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할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것처럼, 이제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한테 해주시면 돼요.

그러면 할머니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예요."



남겨진 것들

미희가 떠나기 전에 수첩을 건넸다.

"할머니, 이거 가지고 계세요. 우리가 함께 읽은 편지들이에요."

수첩을 넘겨보니 빼곡히 적힌 기록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좋아하신 편지들" "할머니가 따뜻하다고 하신 편지"



새로운 토요일들

미희가 떠난 후의 토요일들. 경숙은 혼자였지만, 수첩이 있었다.

편지를 읽고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수첩을 펼쳤다.

미희가 남긴 기록들이 기억을 도와줬다.

새로 온 봉사자들에게도 말했다.

"이런 편지들... 그냥 한 번씩 읽어주자. 누군가의 마음이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미희에게서 편지가 왔다.

경숙은 그 편지들을 수첩에 끼워뒀다.

몇 년이 지났다. 경숙의 기억력은 더 나빠졌지만, 수첩만큼은 늘 간직했다.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았다. 미희가 가르쳐준 대로.

기억이 사라져도 따뜻함만큼은 남게 해 준 사람.

편지들은 여전히 버려졌지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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