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급실 간호사 수진의 새벽 3시
새벽 세 시의 응급실은 늘 같은 빛깔이었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 소독약 냄새와 파편처럼 튀는 신음소리가 뒤엉킨 창백한 공간.
지방 간호대를 졸업해 서울 대학병원에 들어온 지 2년,
수진은 다섯 번째 연속 야간 근무를 버티며 간호사 스테이션에 몸을 기댔다.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버린 지 이틀.
고향을 떠나 혼자 적응하기도 벅찬데,
갈라진 목으로 환자에게 설명하고 보호자를 달래고
의사와 소통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간호사님, 저희 아버지 언제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쉰 목으로 답할 때마다 자신이 더 초라해지는 듯했다.
불안에 떨던 보호자의 시선이 ‘아픈 의료진’에게로 옮겨가는 순간이 괜히 미안했다.
손끝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스테이션과 처치실 사이를 오가며 메탈 트레이를 들고,
차가운 수액 팩을 갈아 끼우다 보니 감각이 희미해진 탓이다.
주머니 속 낡은 손난로는 이미 식어 있었다.
이런 밤이 언제 끝날까.
그때 접수창구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저분부터 먼저 봐주세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형광색 앞치마 대신 두꺼운 패딩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이마에 거즈를 붙인 채로도 다른 환자를 챙기는 모습—미희 씨였다.
병원 근처 편의점과 꽃집에서 종종 마주치던 그 유쾌한 사람.
만날 때마다 사탕이나 작은 카드를 건네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던 그녀가
오늘은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미희 씨, 어떻게 다치셨어요?” 수진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 계단에서 살짝 미끄러졌어요. 별일 아니에요.” 그녀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오히려 수진 씨가 더 안쓰러워 보이는데요? 목소리 쫙 쉬어버렸네요.”
담백한 농담에 수진의 코끝이 순간 뜨거워졌다.
“간호사님, 3번 침상 심전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의사의 건조한 지시.
“네, 지금 가겠습니다.”
수진은 미희 씨에게 미안한 눈길을 건네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내 그녀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감기 기운이 좀….”
“목소리 들어 보니 많이 아프시네요.”
작은 핫팩 한 장과 목캔디 두 알이 담긴 봉지가 수진의 손에 얹혔다.
“저도 예전에… 많이 아팠거든요. 그때 간호사분들이 정말 잘 챙겨 주셨어요.”
미지근한 열이 손바닥 피부를 부드럽게 녹이며 번졌다.
수진은 문득 고향 부엌을 떠올렸다
감기에 걸린 딸을 위해 어머니가 끓여 주던 생강차,
호호 불어 주던 따스한 손바닥.
서울에선 아프면 혼자 약국을 찾는 게 전부였는데.
“그래서 이런 거 보면… 자꾸 챙기고 싶어 져요.”
미희 씨가 웃으며 목캔디를 건넸다.
“조금이나마 나아지셨으면 좋겠어요.”
캔디의 허브 향이 목구멍을 감싸며 칼칼함을 밀어냈다.
“정말 고마워요.” 수진이 속삭였다.
“처치실로 들어가실게요.” 수진이 안내를 시작한 순간,
응급실 전체에 알람이 울렸다.
“구급차 도착 3분 전, 심정지 환자!”
수진은 멈칫했다. 심정지 환자가 오면 모든 손이 필요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저는 급한 게 아니니까.”
알람이 멎자, 얇은 정적이 응급실을 덮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가 더 또렷이 들렸다.
수진은 숨을 고르고 이마 상처를 마지막으로 소독한 뒤 거즈를 새로 붙여 주었다.
“미희 씨는… 항상 이렇게 다른 사람 먼저 챙기시나요?”
그녀가 잠시 멈칫하다 웃었다.
“음… 받은 게 있으니까요.”
“받은 게요?”
“작년에 큰 수술을 받았거든요.” 미희 씨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받은 친절이 쌓이다 보니,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 졌어요.”
수진은 손길을 멈췄다. 그녀의 말이 핫팩보다 더 따뜻했다.
처치를 마친 뒤 수진은 미희 씨를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늘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수진 씨도 사람인데 아플 수 있는 거죠. 무리하지 마세요.”
평소처럼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드는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수진은 주머니 속 핫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그날 밤 남은 근무 시간 동안, 수진의 마음은 온화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알아봐 주고 먼저 다가와 준다는 사실이,
핫팩보다 뜨겁게 손끝을 데웠다.
환자를 대할 때도, 보호자에게 설명할 때도,
쉰 목소리 한가운데 부드러움이 스몄다.
새벽 여섯 시 교대 시간, 수진은 동료에게 말했다.
“오늘 미희 씨가 응급실에 왔었어.”
“아, 그 편의점에서 자주 만난다던 분?”
“응. 다쳤는데도 오히려 날 챙겨 주더라고.”
수진이 핫팩을 주머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정말… 참 유쾌한 분이야.”
근무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
창밖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연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수진은 핫팩을 꼭 쥔 손을 살짝 펼쳤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아주 조용히.
가방 속 목캔디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걸음마다 귀에 닿았다.
그 소리조차 포근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오랜만에 분명히 느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