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주인 정화의 봄---
6개월이 지났다.
처음 한 달은 여전히 힘들었다.
미희 씨의 리본이 걸려 있어도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3개월쯤 지나니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났고, 꽃의 향기를 진짜로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화의 꽃집은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마다 새로 들여온 꽃들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고,
카운터옆에는 미희 씨가 준 작은 리스가 여전히 걸려있었다.
‘오늘도 당신을 응원해요.’
그 짧은 문장이 정화의 하루를 바꿔 놓은지 벌써 반년.
이제는 그 리본이 바래져도 갈아 달지 않았다. 그 흔적 자체가 소중했으니까.
매출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화 자신이 달라졌다.
꽃을 더 이상 계산이 아닌 꽃 자체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손님들의 얼굴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 어느 날 오후, 정화는 창가에서 특이한 풍경을 목격했다.
늘 경쾌한 걸음으로 지나가던 미희 씨가 가게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형광 빛 앞치마는 여전했지만, 어깨가 움츠러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는 미희 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화면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가끔씩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은, 평소의 밝은 미희 씨와는 전혀 달랐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미희 씨도, 사람이구나.
항상 누군가에게 뭔가를 건네던 그 손이,
지금은 그냥… 혼자서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며칠을 더 지켜보니, 패턴이 보였다.
미희 씨는 매주 수요일 오후 3시쯤이면 늘 그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
그제야 무거운 걸음으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때로는 가방끈을 단단히 움켜쥐거나, 옷깃을 여러 번 매만지는 모습도 보였다.
정화는 추측했다. 병원일까? 면접일까?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
미희 씨도 무거운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 유쾌한 웃음 뒤에도,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는 것.
정화는 생각했다. ‘항상 받기만 했는데… 이제 제가 뭔가 해볼 차례가 아닐까?’
수요일이 다가왔다.
정화는 며칠 전부터 고민에 빠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미희 씨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까?
괜히 나서서 부담만 주는 건 아닐까?
가게를 정리하면서도 계속 벤치를 힐끔 거렸다.
어떤 꽃이 좋을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해봤지만, 매번 어색했다.
결국, 소박한 들 꽃 몇 송이를 골랐다.
화려하지 않은, 미희 씨가 좋아할 것 같은 노란 프리지아와 하얀 안개꽃.
꽃다발에는 작은 카드를 달았다. 몇 번을 쓰고 지웠다.
너무 거창해도, 너무 간단해도 이상 할 것 같았다.
미희 씨가 해주던 것처럼, 짧고 진심 어린 문장을 찾으려 애썼다.
‘늘 고마웠어요. 오늘도 응원할게요.’
오후 2시 50분
정화는 꽃다발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꽃다발을 든 손에 땀이 차 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혹시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괜한 일이었나?’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망설임들이 계속 올라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6개월 전,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미희 씨가 망설이지 않고 리본을 건넸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미희 씨도 분명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거절당할 수도 있고,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은 마음.
한걸음 한걸음, 짧은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3시 정각. 미희 씨가 나타났다.
여전한 형광빛 앞치마, 여전한 걸음.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미희 씨의 표정이 확실히 달라졌다.
평소의 환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턱을 손으로 괴고 휴대폰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가끔씩 눈을 꼭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고, 입술을 꾹 깨물며 뭔가를 참는 듯했다.
정화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다가갔다.
“저기… 미희 씨?”
미희 씨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재빨리 평소의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미소 뒤로 약간의 떨림이 보였다.
“아, 꽃집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거요…’ 정화가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냥… 음... 받으세요.”
미희 씨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정화를 바라보았고, 다시 꽃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웃음 뒤에 작은 떨림이 스쳐 지나갔다.
“저한테요…?” 목소리가 작아졌다.
“왜… 왜요? 제가 받을 만한 게…”
“아, 그냥요…” 정화도 말이 어눌해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그동안 제가 받은 게 많아서 … 저도 뭔가 드리고 싶었어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졌다.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다.
“6개월 전에… 제가 정말 힘들어할 때, 리본 주셨잖아요.
그때 그게… 정말 많이 도움이 됐어요.”
정화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서 이번엔… 어, 음… 제가 응원하고 싶어서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미희 씨는 한 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향긋한 프리지어 냄새를 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잎들과 멀리서 들려오는 일상의 소음들만이 그 정적을 채웠다.
그 순간, 평소에 꽁꽁 숨겨두던 감정들이 조금씩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고마워도 되잖아요…” 정화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가끔은…”
그 말에 미희 씨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손으로 눈가를 살짝 눌렀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매주 이 시간이 제일 힘들어요. 병원에 추적검사받으러 가는 시간이거든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2년 전에… 큰 병을 앓았어요. 다행히 잘 이겨냈는데,
그래도 정기적으로 확인을 해야 하거든요.”
손가락으로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혼자 가려니까 괜히 무서워졌어요.
괜찮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또 2년 전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요…”
미희 씨가 잠깐 웃었다.
평소의 밝은 웃음과는 조금 다른, 많은 것을 견뎌낸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하루하루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혼자 간직하긴… 좀 아깝더라구요.”
미희 씨가 웃으려 했지만, 그 웃음은 평소와 달리 조금 떨려 보였다.
정화는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지면서 동시에 목이 메어오는 느낌이었다.
미희 씨는 유쾌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저 밝은 성격이 아니라, 소중함을 아는 사람의 간절함이었구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이 꽃들과 함께 가면 될 것 같아요.”
미희 씨가 꽃다발을 가슴에 꼭 안았다.
노란 프리지아가 그녀의 앞치마와 어우러져 더욱 환하게 보였다.
“생명력 가득한 꽃들이랑 함께라면… 덜 무서울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그때서야 진짜 미희 씨 다운 미소가 돌아왔다.
억지로 지은 밝음이 아닌 ,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미소.
“근데 사장님도 참…” 미희 씨가 작게 웃었다.
“저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걸 주시네요.”
“어… 그게…” 정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희 씨한테 배운 거예요. 이유 없이 누군가한테 좋은 걸 주는 법.”
그날 오후, 정화는 가게로 돌아와 문득 깨달았다.
6개월 전 자신이 받았던 그 따뜻함을,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미희 씨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리본을 건넸던 것처럼,
자신도 아무 이유 없이 꽃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받은 위로가 이제 주는 위로가 되어,
다시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들고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미희 씨가 말하던 그 ‘유쾌함’이구나.
며칠 후, 정화는 가게 문에 작은 안내문을 붙였다.
‘무료 꽃 나눔-힘든 하루를 보내고 계신 분들께’
매주 수요일마다 준비한 작은 꽃다발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병원 가는 할머니, 면접 보러 가는 청년, 이별을 겪은 직장인…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받는 순간의 표정은 모두 같았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그 따뜻한 놀라움
한 달 후, 동네에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꽃을 받았던 할머니는 아파트 화단에 세 꽃을 심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가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면접에 합격한 청년은 카페에서 힘들어 보이는 손님들에게
몰래 쿠키를 하나씩 더 주곤 했다.
미희 씨가 시작한 작은 친절이 조용히 번져가고 있었다.
정화는 이제 알았다.
미희 씨의 유쾌함. 그건 아무 걱정 없는 가벼움이 아니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은 후에 찾아온 간절한 온기였다.
죽음을 마주했기에 더욱 소중해진 하루하루를 ,
혼자 간직하지 않고 나누려는 마음.
그 온기는 나누어야 더 커진다는 것을.
에필로그
가을이 왔다.
정화의 꽃집 앞 벤치에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앉는다.
각자의 무게를 지고, 각자의 시간을 견디며.
그리고 그들 곁에는 언제나 작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
미희 씨는 여전히 그 형광 빛 앞치마를 입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사탕을 건네고, 여전히 계단을 세며 올라간다.
“오늘도 해냈네요.”라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말을 건넨다.
하루하루가 선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그녀의 가방 안에도 누군가 건넨 작은 선물들이 들어있다.
정화의 꽃, 지훈이 해외에서 보낸 엽서, 동네 아이들이 그린 그림…
받는 것도 배운 미희 씨는, 이제 더욱 유쾌해졌다.
“미희 씨, 참 유쾌하시네요.”
그 말이 이제는 동네 곳곳에서 들여온다.
작은 친절들이 돌고 돌아, 모두를 조금씩 유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미희 씨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선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