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어떤 일이든 전문이 아닌 쪽에 손을 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단 달가운 얼굴은 하지 않습니다. '그 분야'가 좁을수록, 전문적일수록, 그리고 권위적일수록, 사람들의 자부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날아오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p.12-13)
1.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의 높이도 제각각이다. 만약 어려운 테스트를 통과해야 자격이 주어진다면 문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누구나 도전이 가능한 직업도 있다. 소위 취미 생활로 입문 가능한 영역이다. 이를테면 예체능 분야에 그런 직업군이 많은 듯하다. 사진이라든가, 그림이라든가, 댄스라든가, 게임이나 운동에 관련된 그런 일들.. 글 쓰는 일도 그중 하나다. 아무래도 이런 분야의 일들 자체가 가지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 직업의 타이틀보다는 그 직업이 해야 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다.
당연하게도 문턱이 낮다는 것은 일의 난이도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한에 가까운 경쟁자들 속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여타 직업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그 분야'가 넓을수록, 복합적일수록, 기회가 평등할수록 그 분야에서 꾸준히 성과를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애초에 어떤 성과를 내야겠다는 목표로 시작할 수 없는 분야인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줄 알고 볼펜과 노트가 손맡에 있다면, 그리고 그 나름의 작화 능력이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일단 써져버립니다. 아니, 그보다 일단 소설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져 버립니다. (p.14)
2. 소설은 써본 적 없고, 아직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느껴본 적도 없다. 소설이라는 것은 나에게 마치 히말라야 등반과 같은 느낌이어서 내가 그곳을 올라갈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비현실적 감각과도 같다. 그럼에도 소설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에 대한 호기심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니. 저자는 겸손의 표현으로 말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히말라야 등반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고작(그렇다고 나의 글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동네 뒷산정도의 짧은 산문을 쓰는 것도 땀을 뻘뻘 흘리지 않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이 그렇다고 말하면 굳이 트집 잡을 이유는 없다. 나 역시 글을 써볼까 하고 한 자 한 자 적다 보면 무언가 만들어지긴 하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p.16)
3. 그렇다. 당장 글을 쓰고 싶은 이유가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링 위에 올라가는 것도 사실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링 자체에 오르는 것이 목표는 아닌 것이다. 그곳에서 날아오는 갖은 펀치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오래 버티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p.20)
4. 글을 쓴다는 것, 아니 글뿐 아니고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이라는 형태의 본질이 모두 그렇다. 일의 성과라는 것은 용량을 알 수 없는 컵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해서 넘치지 않고서는 어떤 성과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일정량의 노력을 부어야지 무턱대고 많은 양의 노력을 한 번에 쏟았다가는 대부분 흘러 넘쳐 버리거나 전혀 성과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저속의 기어가 속도는 낮을지 몰라도 힘은 강한 법이다. 그것이 소설에도, 우리들의 일에도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삶도 하나의 소설과 다름없지 않나 싶다.
인생 설계란 웬만해서는 예정대로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p.34)
5. 멀리 인생까지 말하지 않고 오늘 하루 계획만 보더라도 예상대로 풀리는 일이란 없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잘 안 풀리는 날이 디폴트이고 잘 풀리는 날이 이상한 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예정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면 '그래 이게 원래 삶이지.' 하고 생각해야 삶의 대부분에서 마음이 평안하다. 대부분의 날들은 잘 안 풀리는 날이니까. 계획대로, 무난하게 흘러가는 소설은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다.
그다음 일은 또 그다음 일입니다. (p.58)
6. 목표가 거창할수록 시작하기 어렵다. 가야 할 곳이 멀리 있을수록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만 산다는 기분으로 해야 할 일도 있는 것이다. 번아웃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의 원인은 비현실적 큰 꿈과 현실 속 보잘것 없어보이는 나의 차이에서 오는 정신적 그로기 상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높은 산을 올라가야 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지금 눈앞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입니다. (p.77)
7. 매일 마주하는 순간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 문제가 사소하고 볼품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이 내게 중요한 일이다. 글 쓰는 것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어떤 글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지 사람들이 내 글에 어떤 평가를 내릴까를 고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 글자 적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