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루의 밤 ep.29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 쉽게 지친다. 아침을 여는 알람 소리, 늘 마시는 커피 한 잔, 같은 풍경을 지나 걷는 출근길.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될수록 우리의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상상력은 말라붙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풍경을 그리워한다. 어디든 떠나고 싶고, 무언가 새로운 자극을 통해 나를 환기시키고 싶어진다. 하지만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몽상의 시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깊은 상상은 가장 익숙한 물질에서 태어난다.”
몽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몽상은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세계에 닿게 해주는, 감각적 사유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 몽상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바슐라르는 일상의 사물들—물, 불, 공기, 흙—이 우리 상상력의 근원이 된다고 본다. 그는 이를 ‘물질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물과 꿈』에서 그는 말한다. “물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꿈이다.” 흐르는 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흐름의 깊이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한 방울의 고요한 물 위에서 마음의 침잠을 느낄 수 있다. 몽상이란 그런 것이다. 눈을 감지 않고도, 어딘가 멀리 떠나 있는 상태.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일상의 틈 속에서 열리는 또 다른 감각의 세계.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피에르 쌍소 역시 바슐라르의 사유를 따라, 『느리게 산다는 것』에서 일상의 반복이야말로 상상력이 머무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아이들은 책상 위에서 연필을 깎다가도, 그 조각을 보며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다.” 익숙한 물건의 규칙성과 안정성이 마음을 풀어주고, 그 틈으로 우리는 생각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지겨움’과 ‘반복’을 같은 뜻으로 여긴다. 하지만 반복은 항상 지루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은 때때로 상상을 품을 수 있는 안정된 리듬을 만들어준다. 익숙함은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고, 그 틈에서 감각은 다시 살아난다.
바슐라르는 『공기의 시학』에서 말한다. “우리는 매일 공기를 마시지만, 공기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가장 흔하고, 가장 투명하고, 가장 부드러운 그것. 우리는 바로 그것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아간다. 몽상이란 결국,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감각이다. 매일 마시는 찻잔의 김에서, 창문에 내려앉은 빛에서, 한 장의 종이에 그어진 연필 자국에서조차 우리는 사유의 문을 열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어디든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 어디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가만히 머물며 상상을 시작하는 일이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오래된 풍경을 다시 바라보는 느린 주의다. 오늘 당신의 일상이 지겨웠다면, 잠시만 멈춰보자. 당신의 곁에 있는 사물들, 매일 반복되는 순간들. 그 안에 몽상이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지루함도 또 하나의 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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