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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by lala

처음 만난 날. 소리 없이 입을 벙끗거리자 탁한 안개에 가려졌던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조금씩 윤곽을 잡아가는 듯했다. 불쑥 서연이의 말간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고, 서연이의 냄새가 느껴졌다. 지금도 내 옆에 서연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늘 함께였으니까. 이제 난 서연이가 없어도 서연이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정도로 임서연은 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 습관. 습관이 존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끌려서 찾게 되고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되어 버린 습관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가물가물했던 기억은 점차 너에 대한 확신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 모든 건 다 너를 좋아해서 시작했던 거고 사랑으로 점철되어 갔을 뿐이다. 한때 요동쳤던 순간들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이 모든 건 분명 사랑이었다.


비록 서연이가 의식도 없이 생사를 오가고 있더라도 나는 서연에게 내가 너와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계속 이름을 불러주다 보면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는 서연의 영혼도 제 몸으로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머무른 나는 준비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서연이를 처음 본 건 신입생 입학식에서였어요.”


성적우수자로 강단에 선 임서연은 움직임도 없이 나무처럼 붙박여 있었다. 먹구름 색 머리카락에 양복을 입고 선 늙은 얼굴이 흘러 내려오는 안경을 느리게 추켜올리며 환영 인사를 할 동안 임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꽤 기괴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치 헌 양복이 새 교복을 축조해 낸 것만 같은 기이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늘어지는 교장의 연설에는 뿌듯한 만족스러움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으나 바로 앞에 서 있는 교복 입은 학생은 웃음기 하나 없이 피가 다 빠져나간 듯 한 얼굴이었다. 높은 강단을 우러러보며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손뼉을 마주쳤다.


“임시 반장은 서연이가 하는 게 좋겠지?”

배정받은 반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담임은 말을 꺼냈다. 순간 왜 그게 당연한 건지 의아했으나 대답은 뒤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학부모들은 네, 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생각보다 많은 눈들이 임서연을 향해 있었다. 담임은 반장이 된 서연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대부분의 특권이 문제였지만 그중 가장 독특했던 건 자리 배치 권한이었다.

“그거 들었어? 담임이 자리 배치할 때 참고하라고 이름 옆에 등수까지 적어서 임서연한테 줬다던데?”

임서연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짝다리를 짚은 여학생이 다 들리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구르프를 말고 있던 애가 설마, 하며 윗입술을 실룩거렸다.

“누가 교무실에서 봤다던데.”

“개 오버야.”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칠판 제일 잘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 자리 앉고 좀 잘한다 싶은 애들은 뒤로 앉힌 거잖아.”

여봐란듯이 소리를 높이던 짝다리는 기어이 서연의 책상다리까지 발로 툭 차서 쓰러뜨렸다. 그 바람에 옆에 앉아 있던 내 자리로 책이며 필통이 우르르 쏟아졌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나는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험담 할 거면 자기들끼리 안 들리게 하던가. 한마디 하려고 몸을 일으키던 나는 하마터면 놀라 욕을 내지를 뻔했다. 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필통을 줍는 임서연하고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임서연은 내 의자 밑에 떨어진 샤프를 주워 담으려 상체를 더 깊게 숙이고 기어들어 왔고 나는 어정쩡하게 의자를 뒤로 빼며 길을 비켜주었다. 짝다리와 구르프는 사과도 없이 키득거리면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는데 막상 피해자인 임서연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눈들이 많은데도 임서연은 그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침착하고 덤덤했다. 심지어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기시감이 밀려왔다. 움직이는 입술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웃음, 부딪히는 눈짓들 속에 오가는 경멸,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구경거리가 되었던 날들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고부터였다. 갑자기 키가 16cm나 커버렸고 나는 원하든 원치 않던 내 존재감이 드러나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쉬는 시간마다 창문과 교실 문에 서서 흘깃거리며 구경하는 애들이 늘어갔다.

“쟤야? 얼굴이 왜 이렇게 작고 하얘. 연예인 지망생인가?”

“머리 색깔 예쁘다, 블루블랙인가?”

“잘생겼다, 내 이상형이 무쌍에 눈매 긴 사람인데.”

어떤 날은 한 학년 위 선배가 찾아와 네가 내 여친을 꼬셨냐며 멱살을 잡기도 했다. 드잡이하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반 애들 또한 내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뒷덜미를 잡아끄는 갈고리처럼 느껴졌고, 흘깃거리는 곁눈질은 늘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내가 등장할 때마다 안개처럼 깔리는 기류는 망령처럼 나를 쫓아다녔다.


몸은 점점 컸지만 나의 자존감은 점점 죽어가던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앞머리를 길게 내려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임서연과 눈동자가 맞물렸을 때 이 모든 기억이 덮쳐왔던 걸까. 그저 나를 닮은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서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기시감이 현실감으로 겹쳐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의식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고 그 존재를 흡입하듯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그저 당연한 수순처럼 흘러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그렇게 서로가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임서연과 나는 어떻게든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 갈 수도 없고, 그만 보고 싶다고 끊어낼 수도 없는 그런 운명 말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공허한 눈동자에 꾸역꾸역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닮은 우리의 공통점이었다.


지잉. 그때 테이블 위로 휴대폰이 낮게 울렸다.

“어, 잠깐만.”

형사는 급하게 손을 뻗어 문자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의자 뒤에 등을 깊게 묻은 그는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두툼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더부룩하게 솟아오른 윗배가 그의 심경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미안,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러니까 결국 서연이가 주변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했다는 말이지?”

형사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고 멀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얘기를 한 문장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느냐는 표정이다. 나에게는 그 말이 머그잔에 눌어붙은 커피 자국처럼 들려왔다. 어른들은 참 간추리는 걸 좋아하고 결과 내기를 즐겨한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그러니까’와 ‘결과’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 줄 알고. 과연 그 속에 진실이 담길 수나 있는 걸까. 어쩌면 그들이 알고 싶은 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연이는 왜 선생님께 말을 안 했대? 선생님들하고 서연이의 관계는 어땠니.”

“성적우수자였으니 대부분 좋아하셨지만 제가 볼 땐...”

“네가 볼 땐?”

형사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대치 상태 같았어요.”

“대치?”

“뭐, 관계가 좋아 보여 봤자 선생들은 등급 매기는 사람들이고 학생은 점수를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늘 긴장하고 있었죠.”

“너무 네 주관이 섞인 것 같은데. 보통 우등생들은 예쁨 받기 마련이니까.”

형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십대 애들이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보통이라는 게 어떤 건데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서연이도 보통 우등생이 아니었고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서연이가 울었어요. 수학 때문에.”

나는 형사의 말을 가로채며 말을 꺼냈다. 또다시 형사의 입에서 나오는 ‘그러니까’라는 말이 계속 심기를 거슬렸다.


서연이가 운 건 개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수학 수업이 끝나자 서연은 태블릿을 들고 일어서더니 수학 선생한테 향했다.

“선생님,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요.”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열댓 개의 머리핀으로 꼬장꼬장하게 꽂아 넣은 수학 선생은 가져와 보라는 듯 손끝을 까닥였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그때 왜 서연이는 수학 선생한테 모르는 걸 물어봤을까 싶다. 학원에서 물어보면 다 알려줄 테고 예습으로 이미 다 배웠을 문제일 텐데 말이다. 어쩌면 쉬는 시간에도 질문을 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눈도장을 찍고 싶었거나 아니면 수학 선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럴 심산이었다면 서연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듯했다. 수학 선생한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으니까.


“답이 틀렸는데요.”

서연의 말에 주변의 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그때 앞문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며 학생들이 쓰러졌다.

“아 씨, 밀지 말라고.”

맨 밑에 깔려있던 학생이 발악하자 애들은 낄낄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최도윤이 누구라고?”

“저기 가운데 앉아 있잖아. 대충 봐도 눈에 띄는데 뭘 물어.”

아이라이너를 눈썹 끝까지 바른 여학생 한 명이 낮게 욕을 지껄이며 탁탁 먼지를 털어냈다.

“헉, 최도윤이 지금 나 쳐다본 것 같아. 어떡해!”

“너네! 조용히 좀 해.”

수학 선생이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나서야 애들은 조용해졌다.

“답은 2번이에요.”

그때 서연이 태블릿 위에 연필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삽시간에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쑤군대는 소리가 내 귀에도 정확히 들려왔다.

뭐야, 수학이 수학도 못 풀어. 선생은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에 흑막이 씐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문제를 풀어내려고 애썼지만 쉽사리 답은 나오지 않는 듯했다. 탁탁거리며 태블릿을 두드리는 펜슬 소리가 격해질수록 점점 더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때 다음 수업이 시작되는 종이 울렸고, 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 너 근데 태도가 그게 뭐야?”

순식간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싸늘한 목소리가 교실을 찌를 듯 튀어나왔다. 당황한 서연은 태블릿 덮개를 차마 다 덮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생은 경멸 섞인 눈으로 서연을 쏘아보더니 인성이 글러 먹었다, 요즘 애들은 적정선이라고는 모른다, 이름하고 번호를 대라는 둥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따라 나오라고 서연의 어깨를 툭 밀치고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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