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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보이차, 그리고 커피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경이로운 선물

   세계 차나무의 모수(母樹)라고도 하는 대엽종 차나무에서 딴 잎을 햇빛에 말리거나 발효하여 만든 중국차가 보이차(普洱茶)다. 여러 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중국 윈난 성 남부의 보이 지구에 집하하여 각지로 보낸다고 하여 이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녹차는 신선한 차를 상품으로 치지만, 보이차는 오래된 것을 상품으로 친다. 보이차에는 생차(生茶)와 숙차(熟茶)가 있다. 


  생차는 차나무에서 딴 잎을 햇빛에 말려 만든다. 바로 만든 차는 청년처럼 싱싱하지만, 부드럽고 그윽한 맛은 없다. 쓰고 떫은맛이 남아 있어, 특히 나처럼 위장이 약한 사람은 먹고 나면 위통이 있을 정도로 기운이 강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강한 기운이 가라앉으면서 맑고 그윽한 황색 차로 변한다.

 

 숙차는 악퇴발효시킨 차를 말한다. 악퇴발효(渥堆醱酵)는 찻잎에 물을 뿌린 후 두텁게 쌓아 인공적으로 발효시키는 방법이다. 악퇴발효 시킨 숙차는 탕색이 진한 붉은 빛이 난다.   세월이 지날수록 맛도 진하고 순하고 부드럽고 달다. 나는 이 숙차를 먹는다.


  보이차는 누룩처럼 눌러 둥글게 덩어리진(병차) 모양이 많지만, 네모진(전차) 것도 있고, 사발모양(타차)인 것도 있고, 심장모양(긴차)인 것도 있고, 덩어리로 만들지 않은 산차(散茶)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 내가 주로 먹는 차는 2006년도에 구입한 산차다. 처음으로 올라오는 가장 여린 잎을 따서 만든 등급이 높은 특급 산차로 금빛이 난다해서 ‘금아보이(金芽普洱)’라고 한다.


  중국문명이 시작되는 초기에 황제 신농(神農: 농업과 의약의 신)씨가 독을 해독하는 차를 발견하여, 차와 중국문화가 함께 성장해 왔다. 동한시대의 명의 화타의 ‘식론(食論)’에 ‘차를 오래 먹으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차의 효능을 적어 놓았다.


  ‘보이차는 피부 부스럼을 치료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담을 삭이고, 갈증을 해소한다. 보이차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체한 음식을 소화시킨다. 보이차는 약하게 쓰고 달며 맛과 기운이 강하고 세며 구토, 풍, 가래에 좋고 고기를 잘 소화시킨다. 보이차는 기를 다스리고, 막힌 곳을 뚫고, 풍한을 치료한다.’


  보이차의 효능을 다룬 기록들은 엄청 많다. 보이차에는 탄닌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데, 이 탄닌은 세균의 단백질을 응고하여 세균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풍부한 비타민 공급원이며,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과와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고 현대의 과학자들이 입증한 바 있다.      


  20여 년 전 북경에 처음 갔을 때 보이차를 만났다. 그 때 전날 먹은 기름진 중국음식에  체해 있었다. 소화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위가 멈춘 듯한 상태였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그런데 가이드가 데리고 간 차 상회에서 보이차를 시음하게 했다. 붉은 자사호(紫沙壺: 붉은 모래로 만든 다기)에 우린 뜨거운 차를 서너 잔 마시자 멈춘듯하던 위가 꼬물 움직였고, 한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그 때부터 보이차 사랑이 시작 되었다.


  모든 일에는 수업료가 있게 마련이다. 북경에서 사 온 자사호는 엄청 마음에 드는데, 보이차는 그 날 차 상회에서 먹은 차가 아니었다. 그 날 시음을 한 차는 등급이 높은 차였고 내가 사 온 차는 등급이 낮은 차였다. 물론 차를 우리는 방법이 서툴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북경에서 먹던 그 부드럽고, 개운하고, 촉촉하고, 상쾌하며, 뒷맛이 달고, 단침이 고이는 차는 아니었다. 떫은맛이 강하고 혀를 찌르는듯했고, 촉촉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목마르게 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차였을 것이다. 연식이 오래된 차는 엄청 비쌌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인사동 여기저기를 도는 시행착오 끝에 좋은 루트를 가진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은 한의사였고, 그 분을 통해 평생 먹을 차를 다 사 놨다고 해도 된다. 금아보이 한 박스와 여러 개의 타차와 칠차병차 두통을 샀다. 칠차병차는 차 한 편 한 편을 종이로 싼 다음 일곱 편을 죽순껍질로 포장하여 한통을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14편을 산 셈이다. 2006년 내게 올 때 10년 된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다 안 믿는다고 해도 벌써 25년이 되어 간다. 보통 40년에서 60년 사이의 보이차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그런 차는 고가(高價)여서 잘 만나기 어렵다.  


  한통에 일곱 편씩 싼, 12통을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 한 광(筐:광주리)을 만들고 두 광을 말이나 노새의 등 양쪽에 싣고 마방(馬幇)들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운반했다. 지금은 차를 말에 실어 운반하지 않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넣어 한 광씩 포장하는 방법은 이어져 오고 있다. 차마고도는 차(茶)와 말(馬)을 교역하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다. 그 높고 험준한 교역로를 따라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교환되었다.


  보이차를 마신다는 것은 5천 5백여 년 된 하나의 문명과 문화를 마시는 것과 같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는 문명과 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끊은 적이 없다. 보이차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알은 게 커피다. 커피는 첫사랑의 화인처럼 내 영혼에 지문을 남겼고,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대학교 입학식 날 서클 선배들이 호객 행위를 하며 건네준 다방커피.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뉴욕에 사는 절친J와 커피를 마시러 다니기 시작했다. 


  사루비아, 모정, 유정, 유경, 보리수, 동아, 송죽, 고전... 다 다방 이름이다. 커피값은 130원. 그 중 고전 다방은 클래식을 틀어 준다고 200원이었다. 진종일 이 다방 저 다방을 다니며 붕어처럼 커피를 마셨다. 설탕 한 스푼에 프림 두 스푼. 독약처럼 진한 커피를 열 잔 쯤 마신 날 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각성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 이 각성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우유를 마셨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버지 몰래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두 잔 마셨다. 미군부대 다니는 아버지 친구가 준 로얄살루트21산. 파란색 도자기병에 든 양주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양주를 다 먹을 때까지 아버지는 몰랐다.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시기 때문에 그저 병만 건재하면 되었다. 간이 커져 자주색 도자기병의 로얄살루트21년산도 내가 다 먹었다. 순전히 커피 때문에.     


  그러다 ‘예몽’이라는 카페를 알게 되었다.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테이블이 대여섯 개 쯤 있는 작은 카페였다. 그 카페 주인은 쓸쓸한 테리우스처럼 생겼는데 커피를 시키니 예전과는 다른 커피를 갖다 주었다. 아, 그 향과 맛은 아름답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음식도 그 날 먹은 커피처럼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 적은 없다. 그 동안 먹은 커피는 구정물이었다. 매일 예몽에 출근을 했다. 재즈를 알게 되었고, 원두커피를 갈아 먹는 걸 알게 되었다. 원두커피가 콩처럼 생긴 것도 알았다. 커피 가는 기계를 사러 도깨비 시장을 돌아다녔다. 도깨비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는 무무당(無無堂)이다. 


  한동안 원두를 팔이 아프도록 갈아서 내려 먹었다. 조금 더 지나 커피 메이커를 샀고, 갈아놓은 원두를 샀다. 베트남에 다녀온 이후로는 에스프레소에 꽂혀 에스프레소 뽑는 기계를 사서 보약처럼 에스프레소를 먹었다.


  그러다 분당의 어느 찻집에서 먹은 커피가 깜짝 놀라게 맛있었다. 주인에게 무슨 커피냐고 물었고, 이탈리아의 ‘일리(illy)커피’라는 걸 알았다. 직구를 해서 한동안 이탈리아 문화를 마시듯 행복하게 마셨다. 어느 날 마트에서 깡통에 든 일리커피를 발견했다. 너무 반가워 확인하지 않고 두통을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에스프레소였다. 다음 날 가 봤지만, 내가 먹는 ‘클래식’ 일리커피가 없었다. 심사숙고와 시행착오를 거쳐, 일리 에스프레소와 콜롬비아 스프리모와 케냐AA를 블렌딩(Blending) 해서 먹고 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이 블렌딩한 커피가 너무 맛있다.


  커피는 16세기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이스탄블을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어 세계로 퍼져나갔으니 서양의 차다. 우리나라는 고종황제가 1895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며, 당뇨병 예방에도 좋고, 치매와 파킨슨병 위험도 감소하는 효능이 있다. 보이차는 동양의 대표적인 차고 커피는 서양의 대표적인 차다. 내 몸은 매일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만난다. 그들은 만나 내 영혼을 명징(明澄)하게 하거나, 클린 업(clean up, 정화)하는 꽃을 피운다. 나는 글로벌 인간이다. 


  차와 커피는 벗과 같이 마시면 좋다. 그러나 그 벗을 그리워하며 혼자 마시면 더 좋다. 보이차, 그리고 커피는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이 준 경이로운 선물이다.   


  차와 커피는 벗과 같이 마시면 좋다. 그러나 그 벗을 그리워하며 혼자 마시면 더 좋다. 보이차, 그리고 커피는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이 준 경이로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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