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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보이후드

우리는 누구나 이 생에 불현듯 태어난다

   추분(秋分)은 배신하지 않았다. 추분은 가을을 데려왔다. 추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가을의 첫날(9월 22일)이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었다. 지난 여름은 지루한 악몽 같았다. 인터넷을 바꿨더니 ‘보이후드’가 올라왔다. 그렇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영화였다.

  아, 영화를 이렇게도 만드는구나. 165분 안에 실존하는 6세 소년이 18세 성인으로 자라는 다큐를 보여주듯 만든 영화다. 12년 동안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6세 소년이었던 주인공 메이슨(엘라 콜트레인)과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그 사이 성인이 된다.

  보이후드(Boyhood)는 어린 시절이란 뜻이다. 감독은 리처드 링클레이터다. 그는 비포 선라이즈(1996년), 비포 선셋(2004년), 비포 미드나잇(2013년)을 만든 감독이다. 그 시리즈 영화도 20년의 시간을 같은 배우를 캐스팅해서 만들었다. 그 영화 시리즈를 만드는 사이 ‘보이후드(2014년)’를 찍은 것이다. 이런 감독을 천재라고 해야 한다. 어떻게 서른 중반부터 인생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20년 후의 이야기까지 예측하고 만든단 말인가.

  보이후드는 블록버스터도 없고 심지어 드라마틱도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에 천천히 울음이 고여 오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 잠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어야 한다.

  메이슨의 엄마(패트리샤 아퀘트)와 아빠(에단 호크)는 23살에 준비되지 않은 임신으로 결혼을 한다. 엄마는 교수가 되는 꿈을 접었고 아빠는 집시처럼 집도 절도 없는 뮤지션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생존이라는 긴 강물은 그들의 결혼을 깨트린다. 6살의 메이슨은 누나와 같이 외할머니가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를 한다.

  엄마는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를 하다 아이가 둘인 싱글 교수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아, 이제 메이슨과 사만다가 안정 된 집도 있고, 가정이 있으니 잘 자랄 것 같아 잠시 안심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수의 본색이 드러난다. 그는 술주정뱅이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였다. 입은 옷 채로 엄마와 메이슨과 사만다는 맨손으로 집을 나온다.  

  엄마 친구 집에 잠시 머물며 엄마는 석사학위를 따고 그렇게 원하던 교수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집도 절도 없다. 그러다 파티에서 만난, 정의로워 보이는 참전 용사와 다시 세 번 째 결혼을 하지만, 이 남자 역시 권위적이고 술을 마시고 폭력적이다. 엄마는 그 남자와 다시 헤어지고 론을 받아 산 집에서 산다. 하우스 푸어다. 그 사이 사만다는 대학을 먼저 가서 집을 떠났고, 이제 메이슨이 대학에 입학해서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 영화는 잔잔한 소설 같다. 소설 같은 영화는 수많은 순간의 스틸 사진을 연결해서 만든 극영화 같다. 12년간의 시간을 흥분하지 않고, 감정이입 없이 메타팩션처럼 삶을 보여준다. 아이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성인이 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철없는 부모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 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보이후드를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른이 되었는가. 나이만 먹은 철부지 어른은 아닌가. 

  특히 엄마는 두 자식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 때까지 보살피는 게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 했다. 동물들도 언제나 수컷은 없다. 수컷들은 새끼만 배게 하곤 떠난다. 대부분의 들짐승들은 암컷 혼자 새끼들을 키운다. 오히려 다른 수컷들의 해코지로부터 새끼를 지켜야 한다. 엄마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들에게 세 번이나 의존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나 그 사이 아이들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성인이 된다. 

  철없던 아빠는 음악을 접고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다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나간다. 그 사이사이 메이슨과 아만다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캠핑도 가고 야구장도 가며 다른 아빠들이 하는 아빠 노릇을 한다. 성교육도 시키고, 실연당한 메이슨에게 조언도 한다.

  말이 없고 사회성이 떨어지고 우울해 보인다며 메이슨의 여친은 떠나간다. 메이슨은 엄마의 생존을 지켜보며 말이 없고, 독특한 시각을 가진 예민한 아이로 자란다. 그의 시각은 사진으로 나타난다. 이 대목에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묻어있음을 눈치챘다.  

  남과 다른 시각을 가진 아이는 예술가로 자랄 수밖에 없다. 외롭지 않다면 삶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면 어찌 자신의 존재를 응시할 수 있단 말인가. 존재의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슬픔을 먹고 깊어진다. 슬픔도 외로움도 재산이란 사실을 어느 순간 메이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발 멈추지 말고 그 외로움과 슬픔을 껴안고 훌륭한 사진작가가 되었으면. 외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돈도 많은 예술가는 가짜일 공산이 크다. 슬픔과 외로움은 예술가의 디폴트값이다. 

  고독한 명예와 화려한 고독과 비범한 통찰력과 명예로운 지적허영은 탁월한 예술가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이 모든 것은 무리 속에서 안락을 찾는 자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이유는 생존 앞에서는 사치다. 살아 있어야 자신의 존재이유를 비로소 따지게 된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존재이유를 쫒게 되면 생과의 이별을 고하는 일이다 인류사에 존재이유를 불태운 천재들은 많다. 고흐와 모짜르트와 베토벤과 이중섭이 떠오른다. 생존을 태워 자신의 존재를 밝힌 이들이다.

  이 영화에서 아빠는 생존에 굴복하고 뮤지션에서 ‘좀팽이’로 변한다. 처음으로 실연의 아픔을 겪은 메이슨은 허무를 슬쩍 맛본다. 

  -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냥 최선을 다해 살 뿐이야.

  아빠가 말한다. 그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그냥 사는 거다, 최선을 다해.

  결국 죽을 건데 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춘기 때 했다. 그 화두를 쥐고 오래도록 걷고 걸었다. 지금도 그 질문에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이 생(生)에 불현듯 태어난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부모가 결정되어 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주원리의 법칙에 의해 우리는 여기에 왔다 간다. 함부로 막살다가기도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생명의 비의를 밝혀보려 예술가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소명을 알아차리고 사회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이타작인 삶을 살다 가기도 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살다 가기도 한다.

  누구나 성인이 되기는 해도 어른이 되기는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캐릭터는 메이슨의 엄마 올리비아다. 그녀는 새끼를 잘 키우려 발버둥 치면서도 결코 자신의 꿈도 잃지 않는다. 청춘의 어느 순간의 선택이 운명이 되어버리곤 한다. 운명이란 단어에는 비극의 냄새가 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첫 번째 남편(에단 호크)은 그래도 서서히 어른이 된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과 세 번째 남편은 나이만 먹은 성인일 뿐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란 성인이 되기 전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꿈과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저 두 사람 빼고는 대부분 따뜻한 어른들이다.

  메이슨까지 둥지를 떠나자 올리비아는 작은 아파트로 집은 옮긴다. 아이 둘을 키우며 먹고 살고, 대출금을 갚고, 세금을 내느라 정신없이 살은 그녀는 메이슨까지 자신을 떠나자, 이제 남은 건 자신의 장례식밖에 없다며 오열한다. 

  - 왜 40년 후의 일을 걱정하세요.

 그런 엄마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메이슨이 말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갈 아들은 엄마의 허무를 알까? 엄마의 외로움을 알까? 올리비아가 다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여생을 잘 보내길 기원한다. 모성애 만세, 올리비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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