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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Oct 30. 2022

기대는 나의 힘, 그렇게 엄마가 된다

난임 일기(18) -그날 이후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버티는 힘에 대하여 


갑자기 이루어진 이식 날, 그날 이후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험관 이식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경우는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하지만 기대를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대 후에 오는 실망감이 아닐까 싶다. 나는 모든 아이를 기다리는 모든 예비부모들에게 '버티는 힘'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주식시장에서 통용되던 '존버' = 존 X 버티기 의 법칙은 지금 주식시장 떡락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버티기의 법칙은 주식에만 통용되는 건 아니다. 


나는 이식 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침을 먹지 않던 나는 6시에 기상해서 배에 착상을 도와준다는 주사를 맞고 7시에 아침을 챙겨 먹었다. 일찍 일어나는 덕분에 10시가 되면 잠을 잤고,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었다. 삼시세끼 한식으로 챙겨 먹을 뿐만 아니라 간식까지 빠짐없이 챙겨 먹었다. 


호텔에서 5시에 잠을 깬 나는 그전날 먹고 싶었던 국밥집에 홀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미식가 신동엽이 자주 온다던 집이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이나 더 아침을 챙겨 먹었다. 어차피, 이번 이식을 실패하면 등산으로 살을 더 뺄 생각이었기에 등산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건강한 딩크족의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을 하고 있던 터였다. 


손바꿈을 하여 만나게 된 담당 주치의는 유명한 대사를 날려주셨다.

"언젠가는 됩니다. 그 언젠가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죠. 믿고 함께 가봅시다"


언젠가는 될까? 하는 불안감을 식혀주는 의사의 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언젠가는 된다고 했다. 과학적인 이론은 그러했다.(물론 '착상'이라는 신의 영역에는 의사들도 어쩔 수 없지만.)


이건 마치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시간여행'이 지금은 안되지만, '타임머신'이 언젠가는 발명될 거라는 믿음과도 같았다. 그 언젠가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게 함정일 뿐. 


기대는 나의 힘


계속되는 회사의 코로나 환자 발생으로 pcr을 계속하면서 제발 두줄이 뜨지 마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임신테스트기도 pcr도 어쩐지 계속 한 줄만 떴다. 나의 인생에는 두줄이란 없는 것 같았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이식 후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테스트기에 손을 댄다고 하던데, 그날부터 테스트기의 지옥에 빠지게 된다. 나 또한 그전의 테스트기에 실망해서 절망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끝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이식 후 첫 피검사는 이식 후 10일 후 하게 된다. 빠른 착상을 보이는 사람들, 병원을 다니는 난임 단톡방에서는 이식 4일 차에 두줄을 본 사람도 있었다. 나는 더욱 조급해졌다. 


나는 온갖 임신 수기와 블로그를 찾아볼 때 나만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결론부터 찾아보는 것. 책을 읽을 때 결론부터 열어보고 책을 정독하는 것과 같았다. 임신을 했는지 포기했는지 진행 중인지 최신 글부터 찾아보았다. 그리고 임신을 한 사람 들것의 수기만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비법들이 있는지 어떻게 노력했는지 성공한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누군가는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안 되는 건 왜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동화되기가 쉬운 나는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같이 아팠다. 난임 병원을 함께 다니는 환자들의 단톡방에서 전해져 오던 임신에 성공한 사람들의 엉덩이를 비비는 전통을 따르면서 나는 내심 그녀들의 안정감과 차분함이 부러웠다. 나는 너무 방방 떠있어서 되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불안은 기생충처럼 일상 속에 숨어있다


잘 참았던 나의 마음속에서도 궁금증과 불안은 기생충처럼 알을 깠다. 불안이 번지고 있었다.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주사를 계속 아침마다 배에 꽂아야 하나 회의감마저 들었다. 


참을성 있던 나는 결국 이식 5일 차에 테스트기의 지옥으로 빠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옥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일주일을 참아 보기로 했다. 결국 나는 5일 차 테스트기에 손을 대었다. 스스로 지옥불에 빠진 것이다. 절대 뒤를 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지옥에서 아내를 구해 나왔지만 결국 궁금증에 뒤를 돌아보아 돌이 되고 말았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처럼 나는 나 스스로 지옥에 빠졌다. 

매직아이로 보아도 잘 보일락 말락 하는 5일차 임신 테스트기 선


5일 차 테스트기의 결과는 참혹했다. 겨우 '매직아이'를 해야 보일락 말락 했다. 

아직 이른 건가. 아니면 이번에도 실패인 건가?

나의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6일차에 매직아이인지 테스트기 불량인지 의문이었으나 전날 과 비교하여 점점 진해짐을 느꼈다

6일 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테스트기에 손을 대었다. 

한번 시작한 이상 스스로 끝을 낼 수 없는 지옥이었다. 


어라? 

테스트기가 잘못된 건가? 매직아이가 잘되는 건가? 


결국 점심시간 점심 먹기를 포기하고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에 전화를 돌려서 당일 피검 수치가 나오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딱 한 곳이 당일 수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병원을 방문하여 피를 뽑았다. 


나는 남편은 물론, 아무에게도 병원 방문 사실을 말하지 않고, 방문한 병원에 지금 시험관 진행 중임을 밝히고 피검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검사 후 20분 후 검사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미 양팔은 수액과 주사를 맞느라 피멍이 잔뜩 들어있었다. 처음 간 병원에서는 내 팔을 보고 간호사가 놀라며 핏줄을 찾지 못해 꽂았던 곳에 또 꽂아도 되냐고 물어봤다. 바늘 자국이 난 곳에 다시 바늘을 찌르는 것만큼 아픈 것은 없었다. 


나는 채혈 후 팔에 동그라미 밴드를 붙이고 밥도 먹지 않고 20분 동안 낯선 병원 소파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직장인들의 유일한 낙은 '점심시간'이라고 했는데, 밖에는 점심시간을 맞이하여 밖을 나온 해맑은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햇살은 유난히 좋고 창은 넓었다. 생각보다 점심시간의 역 주변의 산부인과는 여유로웠다. 


곧 나의 이름이 불려졌고, 다시 의사와 만나 결과를 듣게 되었다. 

hcg 수치는 61이었다. 

25 이상이어야 임신으로 보고 100 이상이 되어야 안정권으로 본다고 했다. 이제 이틀 간격으로 더블링이 잘되는지 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의 불안이 잘 전염되고 기대를 함께 하는 남편에게도 병원에 간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잘하고 와 


이식 날 나에게 의사가 한 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저에게 잘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닫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10일 차 시술 병원에 방문하여 피검을 하였다. 

주치의는 나에게 테스트기를 해보았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마스크 너머로 의사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피검사 결과는 바로 나오지 않고 전화로 알려준다고 하였다. 


그날 오후 병원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울리자마자 잘못들을 것을 대비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덜컹했다. 

 

나와는 다르게 업무상으로 전화하여 건조하게 수치를 말하는 간호사의 hcg 수치상의 숫자로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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