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치? 스케치 여행?

주객전도

by 한정선

우리말로 역마살, 조금 세련되게 배가본드?

언뜻 주워듣기로 타고난 사주가 그렇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질량 불변의 법칙'처럼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 총량 불변의 법칙'이 있다.

하루를 놓고 보면 최대 한나절, 대여섯 시간정도가 집에서 버틸수있는 최대치이다.

"나 오늘 종일 집에 있었어."

"며칠 동안 꼼짝없이 집에 있었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내겐 이해 불가한 사람들이다.

그런 내 성향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자의 반, 타의 반, 집순이 신세다.

그러다 갑갑증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약이 필요한 환자처럼 집안 이곳저곳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예전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기분을 되새김질하기도 한다.




원래 그림은 여행 중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잠시 쉬어갈 때, 스케치 한 장하면서 글도 몇 줄 끄적이며, 폼도 잡으면서 여행의 기록을 남기고. 간단한 그림도구를 상비약처럼 챙겨 다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릴 수도, 패스해 버릴 수도 있는 여행 목록 중 하나였는데,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여행 스케치에서 스케치 여행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주객전도'다.

주, 객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갑갑해서 떠난 여행 이건만, 그림 삼매경에 빠져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걷고 싶었던 길, 보고 싶었던 풍경을 뒤로하고 귀경을 서둘러야 할 때, 이건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 되어버린다.

그림 출장!







한쪽으로 기울어 뒤뚱거리는 배, 침몰하기 전에 일으켜 세워야겠다.

구속과 애착을 벗어나고자 떠난 여행이 또 다른 구속의 장이 된다면

여행은 그냥 장소의 이동일뿐이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생각 가는 대로.

그리고 쓰는 것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여행의 이유는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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