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은 2월에 시작된다.

-먼저 와서 우리를 맞아주는 노랑, 파랑, 초록..

by 한정선


기세 등등하던 동장군이 슬슬 뒷걸음질 치는 이맘때, 눈치를 보듯 슬금슬금 봄이 발걸음을 한다.

겨울이 봄을 이기지 못함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미리 봄'을 만나러 제주로 향한다.

스멀스멀 여행의 욕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도, 명분을 찾지 못해 머릿속만 시끄러울 때,

사촌이 제주의 타운하우스를 빌려준다는 제안에 우리는 냉큼 '성급한 봄' 여행에 합류했다.

마치 숙박비가 없어서 여행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처럼.

게다가 본격적인 봄 관광이 시작되기 전 조금 한산한 여행의 행운까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깃발처럼 흔들며 제주로 향했다.



공항을 나서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바람, 제주는 바람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그 바람의 방향과 강도, 햇살의 장단에 따라 바다, 들판, 하늘은 시시각각 기울기가 변하고, 풍경을 달리한다.

바람은 거대란 붓이 되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랑과 초록의 물결을 그리고, 지휘봉이 되어 봄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휘리릭~ 담담한 위로처럼 봄바람이 내 몸을 통과하면, 나 또한 거대한 교향악의 일부가 된다.

2월의 제주는 덜 여문 햇살 아래 햇과일처럼 상큼한 햇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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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노랑 저고리에 초록 치마로 봄단장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3박 4일 짧은 일정, 숙소가 산방산 아래이다 보니 이동 중일 때나 카페, 식당, 어디서나 우뚝 솟은 산방산이 이정표가 되어준다.

가로로 길게 누운 성산 일출봉과 달리, 둥글고 뾰족한 산 모양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모자 같아 재미있기도, 생뚱맞기도 했는데, 며칠을 보다 보니 동네 뒷산처럼 친근해졌다.

멀리서 보면 도시의 나지막한 집들은 보이지 않고 평평한 들판 위의 작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산 아래 마을이 자리 잡고, 마늘, 쪽파, 양배추가 자라고, 사람들이 ' 나도 꽃'하며 꽃받침 포즈를 취하는 드넓은 유채밭이 펼쳐져 있다.

산을 뺑 돌아, 노랑, 초록, 파랑, 검정. 제주의 순진무구한 색깔들이 모여 산다.


식물원이나 온실에서 보던 것과 달리, 제주바다에서 본 백년초 선인장은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다.

해풍과 햇살에 그을리고 무르익은 단단함, 근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풍기는 근육질의 잎과 열매는 자부심과 행복감을 온몸으로 과시한다.

선인장의 고향은 제주,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나고 폼도 난다.

일탈의 궁극적 목적은 귀환. 우리 또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입으로, 머리로만 알고 있던 곶자왈. 그림을 그리다 보니 궁금해진다.

곶(숲)과 자왈(덤불)의 합성어로 고유 제주어인 곶자왈은 과거 경작이 불가능하여 개발로부터 격리되어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주로 방목지나 땔감, 숯을 만들고 약초 등의 식물을 채취하던 곳이었으나, 환경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현재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로 보전되고 있다.

곶자왈의 나무들은, 뿌리를 공유한 듯, 엉키고 뒤틀려 서로를 휘감고,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뻗어 하늘과 땅을 덮은 가지와 줄기로 걷기조차 힘들다. 그 그늘 아래 자라는 양치류, 크고 작은 암괴에 공생하는 이끼류, 숨골, 풍월에서 나오는 서늘하고 따뜻한 기운과 흙냄새, 나무 냄새, 물 냄새가 뒤섞인 오묘한 향. 원시림의 신비를 간직한 숲의 모습은, 시, 공간을 초월한 듯 기이하면서 신성하게 보였다.

곶자왈에서 날것 그대로의 제주, 제주의 속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