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차의 비밀을 간직한 계단, 계단은 비상구가 되었다.

by 한정선





오르막 내리막 휘어진 골목길을 따라 겹쳐지는 기와지붕을 보러 북촌 한옥마을에 갔다가 오래된 계단 집을 만났다.

아스라이 올려다 보이는 대문 아래 가파른 계단은 비장감마저 들게 하지만 층층이 놓인 화분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움직인다. 꽃잔치에 초대받은 손님 인양 각양각색의 꽃들과 눈을 맞추고, 안부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문 앞, 내려다 보이는 계단 꽃밭은 그 사이 자리를 바꿔 앉은 개구쟁이들처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각자의 조망권을 침해하지 않는 계단 정원에서 큰 꽃, 작은 꽃 상관없이, 공평하게 햇살을 받고,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린다. 층층이 꽃이 놓여진 계단은 단차가 있는 베란다 꽃밭 같았다.

길을 가다 잊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오랜만에 보는 계단에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내가 어렸을 때 계단은 집의 연장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집은 가파른 계단과 몇 개의 계단참을 지나야 대문이 나왔고, 여러 가구가 사는 집 마당에는 수돗가, 장독대 외에도 갖가지 가재도구들이 널려있어 우리는 대문 앞이나 계단에서 놀곤 했다.

그럴 때 계단은 바깥 마당이 되고, 때로는 아이들의 놀이터,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며 좁은 집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주택 대신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선 요즈음,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면서 단 몇 층도 걸을 여유가 없이 바빠진 사람들에게 이제 계단은 구시대적 유물이 되었다.


계단은 '비상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한 예로, 나는 정기적으로 다니는 종합병원의 계단을 끝내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환자와 방문객으로 꽉 찬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있다. 병원 종사자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계단, 용케 찾았지만 한 번에 갈 수없게 나눠져 있는 미로 같은 구조, 건강을 우선으로 하는 병원에서 건강을 역행하는 구조는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는 것인지.

예전에는 눈만 돌려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계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꼭꼭 숨어버린 계단,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치면 나타날까.

계단은 4대 문명의 발생지뿐 아니라 그 이전 고대도시에서부터 존재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공간 유산이다.

처음에는 단지 이동의 도구로 쓰였던 계단은 인류 문명의 팽창과 함께 수직상승과 수직 욕망의 메타포가 되기도 했다. 주술적, 종교적 목적으로 쓰인 고대의 제단이나 피라미드, 바벨탑 등이 그 단적인 예다.

높낮이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계단, 그래서 계단의 역사는 조금은 왜곡된 시선의 역사이기도 하다.

근, 현대에 들어서면서 계단은 높낮이에 따른 신분의 상징성은 점차 사라지고, 실용과 심미적 요소를 가미한 건축 예술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이동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졌던 계단은 영화 속에서, 또는 건축물의 인테리어로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한 예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는 장면으로 유명해진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의 계단이 있다. 사람들은 그 계단에 앉아 얘기를 하고, 음식을 먹고, 누구를 기다리고, 계단은 마치 야외 카페 같다. (그 풍경을 벤치마킹하듯, 요즘은 거꾸로 실내에 계단을 만든 카페도 종종 볼 수 있다.)

스크린을 뚫고 생생히 전달되는 사람들의 표정에 묻어나는 휴일의 느슨한 자유는 계단이라는 독특한 장소 설정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부산여행에서 만난 초량 이야기길 168 계단이나 해방촌의 108계단 역시 특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시절 삶의 애환이 서린 계단과 현재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모노레일, 승강기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 머릿속 또 다른 계단 이미지는 가끔 영화를 보러 가는 이화여대 ECC 건물 좌우를 통과하는 크고 기다란, 마치 협곡 같은 계단이다.

일정하지 않은 다양한 길이와 넓이의 계단, 경사도 조절을 위해 만든 마당 같이 넓은 계단참, 앉기도, 기대기도, 다리를 뻗기도, 오므리기도 한, 다양한 포즈의 젊은이들은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었다. 넓이 차와 높이차로 인한 다양한 풍경들이 계단을 매개체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계단은 세계 유명 미술관의 인테리어처럼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어주는 계단, 한단 한단 오르내릴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걸터앉아 쉴 수도, 오랜만에 보는 이웃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그런 계단이 보기 힘들어진 요즘, 우연히 만난 계단에 고향집 계단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