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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Oct 24. 2021

당신에게도 그러한 사람이 있는가?





늘 지나가던 카페에서 갓 볶아낸 고소한 원두 향에 함께 마셨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길가에 하얗게 붉게 피어나는 벚꽃을 보면 막연히 보고 싶어지는 사람.

많은 인파 속 익숙한 향수 냄새에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그 사람이 아닐까 두근대게 하는 사람.

술에 취해 돌아가는 깊은 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꼭꼭 닫아둔 마음 문을 비집어 열고 기어코 떠오르고야 마는 사람.


나에게도 오늘처럼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게 사람인지, 그때 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달달한 꽃향기,

연둣빛으로 자라 오르는 풀내음,

시원한 공기를 머금은 비의 향기까지 모두 뒤섞인 봄비 냄새.

매년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비가 또 한 번 기억을 더듬게 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심장까지 흘러간 듯 그 부근이 콕콕 아려온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생애 참 아름다웠던 순간.




교실마다 각자 다른 무지개색으로 페인트칠해진 초등학교였다.

저녁 6시 반, 해가 지면 불빛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시골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검정 똥강아지가 운동장에, 때로는 교실 복도에까지 돌아다녔다.

운동장의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매일같이 까르르 웃음을 쏟아냈고, 학교 관사 뒤편에서 키우던 게으른 닭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울었다.

학교에 발령 났던 그 봄은 유난히도 비가 자주 내렸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갔다. 영원할 것만 같은 비였다.


내 교실은 학교의 후관에 있었다.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가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자주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맞은편 건물의 창문 안쪽에서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종, 건물 기둥 뒤에 쭈그리고 앉아 숨어있는 아이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대 보이고는 금세 다시 어디론가 도망가 숨었다.


4시 반 이면 퇴근을 했지만 마땅히 할 일도, 갈 곳도 없는 곳이었다.

저녁식사를 할 만한 식당도 몇 개 없었다. 그마저도 학부모님들이 운영하시는 가게라 관사에 살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선생님들은 옆 지역까지 밥을 먹으러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산을 하나 넘으면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렇게 25분쯤 차를 타고 가면 바닷가 인근 식당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5시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는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면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죽였다.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며 앉아있으면 겨우 7시가 되었다. 유난히도 비가 내리는 날들이 많아 내 기억 속 그 바다 너머의 하늘은 파란색이 아닌 회색이었다.


새까만 어둠을 뚫고 굽이굽이 산을 넘어 돌아가는 차 안,

차 천정 위로 떨어지는 투둑 투둑 하는 소리가 음악소리와 미묘하게 어우러져 대상도 없이 막연한 그리움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을 동시에 일게 했다.


관사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내려 차 뒤편으로 가 담배를 피웠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과 하얀 연기를 훔쳐보았다.


차로 혼자 돌아온 그에게서는 늘 재 냄새가 났다. 이제 막 그을린 종이에서 날 것만 같은 건조한 향이었다.




커피를 사러 스타벅스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지하철역을 빙빙 돌아 다른 매장을 찾아 겨우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집에 돌아오니 양말이며 바지가 잔뜩 젖어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빗물을 털어낸 우산에서는 달달하고, 싱그럽고, 시원한 봄비의 내음이 풍겨왔다. 축축한 바지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았다. 창문 밖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이 비 냄새가 가시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말라가던 상처에 물이 들어간 듯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다.


봄은 매년 다시 오고,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그날처럼 봄비의 내음도 여전하다.

무엇이 이토록 허전한가 생각해 보니 축축한 이 습기를 바싹 말려줄 것 같은 그 건조한 재 냄새가 빠져 있어서인가 보다.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담배라도 피워볼까. 그러면 이 비 냄새에도 허하지 않을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나의 일부임에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더니,

까맣게 잊었다가도 사소한 풍경, 스쳐가는 냄새 하나에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만다.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는가.

어떤 장소, 어떤 물건, 어떤 냄새에 불현듯 떠올라 온종일 마음을 엉망으로 흩트려놓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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