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절차
"해촉증명서를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에
직접 방문제출하면 말소까지 완료됩니다"
해촉, 협회, 말소…
보험설계사의 세계는 부드럽지 않은 말들이 참 많다.
얼마전 대표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고, 다행히 어느 정도 이해를 해 주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해촉증명서를 바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설계사의 입사는 위촉, 퇴사는 해촉이라고 표현한다.
보험상품을 판매하려면 시험을 보고 자격을 부여 받아야만 하는데, 이를 코드라고 간단히 말한다.
30여개의 보험사와 제휴되어 있었으니, 나도 서른개가 넘는 보험회사들의 내 고유 코드번호가 있었고, 판매 대리점에 소속되었다는 소속코드도 있었다.
위촉을 하면 그 대리점에서의 내 코드가 나오고,
해촉을 하면 모두 삭제된다.
그리고 이직한 다른 대리점에서 새로운 코드가 생성된다. 위촉과 해촉은 코드 삭제와 생성의 연속이다.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는 광화문과 종로에 각기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들을 직접 방문하여 해촉증명서를 내면 좀 더 빠르게 코드를 삭제(말소)하고 새 직장에서의 절차도 빨라질 수 있다.
은행같은 창구에 직원들이 앉아있었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 바쁜 눈들만 보였다. 말소 서류를 작성하고 번호표를 뽑으니 29번.
지금 28번을 상담 중이니 다음 차례는 나다. 창구에서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의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띵-동- 29번고객님~"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가방을 창구 의자에 내려 놓으려는데, 한 남자가 내 코 앞에서 털썩 새치기하며 앉아버린다. 그리고는 창구 안으로 서류를 쑥 디밀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남자의 바로 뒤에서 분노의 콧김을 내뿜으며 그의 정수리와 측면으로 보이는 안경을 쏘아보았다.
정장을 입은 키 작은 남자, 염색끼가 끝에 조금 남아있는 부시시한 머리카락이 내 콧김에 흔들흔들거린다.
정수리에 바람이 느껴지면 돌아보며 죄송하다 말할 것 같았지만, 이 남자는 아니다. 나의 씩씩거림을 들으면서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향적인 나는 화가 나도 말보다는 눈이나 코로 먼저 나온다.
'진짜 뻔뻔하다. 정장이나 가방이 재무설계사 같은데, 고객들 앞에서는 사람 좋은 척, 전문가인 척, 올곧은 척 하면서 고객이 없는 곳에서는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게 전혀 없는 사람이군!'
나도 재무설계사로 출발했기 때문에, 깔끔한 정장과 가방으로 나의 성실함과 바르고 친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정장과 가방이 없을 때 내가 불성실하고 불친절한 건 아니다.
정수리에 콧김을 받아도 요지부동인 이 남자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고객에게는 앞의 모습을, 고객이 가면 뒤의 모습으로 지내는 사람.
기본 예의는 고객이 있는 앞에서만 지키는 사람은 백이면 백 앞뒤가 다른 사람이다.
한 마디 해주고 싶어도 세탁기 돌아가듯 속에서만 요동치다가 결국 그 남자는 자신의 볼일을 다 보고 휑 하니 나가버렸다.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나는 괜히 창구 직원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제가 29번인데요, 저 분이 새치기했어요!"
"서류 주세요~"
직원이 호응해주고 번호표를 확인하지 않아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상상을 잠시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 바쁘니 빨리 서류를 달라며 손을 내밀 뿐.
징징거리는 것 같은 내 목소리에 옆 창구에 앉은 남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지자, 오히려 나는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람..! 당사자에겐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는데 아무도 공감을 못하는 이런 상황이란..!! 이미 지나간 걸 어쩌라고? 라며 생각하겠지..'
무심한 반응들에 초라함을 느끼는 건 내향적인 나 뿐만이 아닐거라 생각하고 싶다.
이미 지나가버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같은 상황이 또 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럴 땐 남아있는 불편한 감정도 씻어내고 앞으로는 야무지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도록 글로 나열해보곤 한다.
[나의 행동]
새치기 당하고 뒤에서 쏘아보기만 했다.
그 남자가 자리를 뜬 후 창구직원에게 하소연했으나 무심한 반응을 보고 기분만 더 다운되었다.
[후회]
새치기남에게 직접 말했어야 했다.
창구직원은 상황파악이 안되는 제 3자일 뿐이다.
제 3자가 무심한 것에 내 기분만 더 초라해졌다.
"29번은 전데요?" 라고 악의없이 크게 말했어야 했다.
[2차 후회]
제 3자인 직원에게 감정을 전달하려 괜히 하소연하였다.
옆자리 남자의 시선에 더 창피해짐을 느꼈다.
[결심]
콧김이 3번까지 나오기 전에 바로 또박또박 팩트만 말하자.
"저기요, 29번은 저에요"
모든 세상이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각종 코드와 번호표, 급여 테이블, 나이, 경력 등등 수치들이 곧 내가 되는 세계에서 앞으로 내 자리를 스스로가 잘 지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