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폰을 바꿀까 말까 한참 고민을 했는데, 멀쩡하게 잘 굴러가는 폰을 또 큰돈을 들여서 바꿀려니 영 아깝기만 했다. 최대한 쓰고 쓰다가 바꾸자라고 마음을 고쳐 먹고 계속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 이런 내 속마음을 읽었었는지, 액정이 보기 좋게 금이 좌악 갈라져 보기가 불편하게되었다. 사용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지만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때마침 이렇게 액정이 깨져버리니, 구실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듯 마지못해 어쩔 수 없다는 듯 휴일에 폰을 바꿔버렸다. 나름 '최신'폰으로 액정도 좀 더 크고 카메라 화질도 좋은 '새 친구'로 거금을 주고 데리고 왔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력이 좋아져 '최신'폰이라고는 하나, 우리 같은 문외한 사람들은 그저 폰 외관만 보고, 카메라 화질 정도만 보고 좋다 나쁘다 정도만 구별할 수 있지, 도대체 어떤 면에서 좋아졌는지 피부로 와닿는 건 별로 없다. 다만, 쓰던 폰의 전화번호나 메시지, 사진등이 새 폰으로 옮겨오는 속도나 기존 쓰던 앱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그대로 저장이 되는 것, 그리고 확실히 빨라진 실행 속도 등은 새 폰을 씀에 있어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동으로 저장되어 버리는 전화번호와 아이디, 비밀번호, 이런 최신 기술력의 혜택을 받아온 지 벌써 십수 년이 다 되어가니, 이러한 편리함의 생활 패턴은 점점 나를, 우리를 디지털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쌤~급해요. OO 엄마 전화번호 좀 알려 주세요
며칠 전 저녁이었다.
수업을 듣는 도중에 지인에게 전화가 울렸다. 수업 들어가기 전에 교실 앞에서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선생님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문자 메시지를 남겼더니, 바로 답문자가 오길 " 쌤~~급해요. OO엄마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라고 문자가 왔다. 얼마나 급하길래, 얘기 끝나고 들어온 지 채 몇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연락이 왔나 싶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다급한 용무겠거니 싶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싶었으나, 내 머릿속엔 010 번호 외에 떠오르는 숫자가 없었으니, 수업 시간 중에 어쩔 수 없이 몰래 핸드폰 주소록을 열어 OO 엄마의 전화번호를 찾아 "복사"와 "붙여 넣기" 하여 문자로 보내주었다.
그러고 수업이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외우는 전화번호는 과연 몇 개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피식 웃음이 난 건 내 기억력에 대한 자조적 웃음이었다.
바보구나. 디지털 바보.
내가 더듬더듬 기억할 수 있는 전화번호라곤 남편과 친정 엄마와 언니, 그리고 아들 둘의 전화번호였다. 정말 "직계가족"만이 , 진정한 나의 "비상연락처" 만이 내 머릿속 남아 있더라.
가방 속에 엔 항상 작은 전화번호 수첩이 들어있었고,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달그락 거리며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척척 번호를 눌러가며 전화를 걸었던 "나때의 시절"에는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친한 친구들, 학교 선후배들, 심지어 단골가게 전화번호도 기억하며 척척 전화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말이지. 이제는 검색을 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 수도 없고, "복사"와 "붙여 넣기"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연락처를 알려줄 수도 없는 시대의 한가운데에 내가, 우리가 있다.
이런 우리를 "디지털 바보"라고 해야 하겠지.
편리함을 얻었으니 그에 맞먹는 기억력이 희생 되는 건가. 편리함과 기억력을 맞바꾸는 건 나이 들어가는 우리 인간들의두뇌에겐 손해 되는 장사 같아 보이지만, 그만큼 "편리함의 기술력"이 발전되는 데에 쓰이겠거니 마음을 내려놓자.
이미 길들여진 편리함에 부러 퇴보되는 "전화번호 수첩"을 만들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다른 쪽의 기억력에 쫀쫀한 긴장감을 주도록 노력해 보자.
구구단을 매일 외워볼까? 퍼즐 맞추기도 해 보고, 가로 세로 열쇠 문제도 풀어볼까?
전화번호 대신 다른 무언가로 나의 두뇌를 채우는 "디지털 바보"로 살아가보자 다짐해 보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