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아파트 후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건너편 13층의 거실과 안방 창문을 매일같이 바라본다. 불이 켜져 있나 꺼져있나, 그러면서 그곳에 TV를 켜고 홀로 누워 계실 엄마의 안부를 간접 확인해 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시기에 큰 집인데도 이사도 안 하시고 계시니, 덩그런 큰집의 더 쓸쓸하고 외로움이 창문 너머 느껴진다. 여러 번 이사도 권유했지만, 나이 드실수록 완고해지는 고집에 아직 그곳을 홀로 지키고 계신다. 매일 안부 전화를 해볼 거라고 다짐을 해도, 나름의 바쁜 일상 속에서 매일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나마 저녁마다 불 켜진 창으로 엄마의 안부를 간접 확인을 하는 것이 나의 작은 효도라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엄마 전화 안 받는데, 엄마 잘 계시지?
나는 막내딸이다.
오빠네는 해외에 있고, 언니네는 여기서 한 시간 좀 떨어진 외곽에 살고 있다. 나는결혼 후에도 계속 맞벌이를 했던 터라, 두 아이를 어릴 때부터 친정 부모님 손에 맡겨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친정집 바로 옆으로 이사를 올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이 훌쩍 커버리고 세월이 이토록 지나도록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갈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차마 엄마 혼자 두고 더욱 갈 수 없게 되어 이렇게 매일 같이 창을 바라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은 이런 생활이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친척 고모들이 엄마와 연락이 안 되면 곧잘 내게 전화를 한다. 해외에 있는 오빠도, 멀리 있는 언니도 엄마의 건강 상태나 안부를 내게 물어보곤 한다. 그럴 때면 괜한 미안함과 부담감에 선뜻 대답을 못할 때도 있다. 가까이 산다고 해서 매일 매시간마다 엄마를 보거나 얘기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행여, 내가 미처 안부를 확인하지 못한 날, 혹시 엄마가 아프거나 하실까 봐 더 마음이 쓰이는 날들이 더 늘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흔히들 가까이 사는 자식이 효자라고도 하던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는 생각이 더 드네.
가까운 물리적 거리와 그 효도와는 비례하지 않는 나의 생활을 보면, 엄마가 더 연로해질수록, 행여 어떤 일이라도 닥치게 된다면, 나중에 돌아올 따가운 시선마저도 감당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요즘 더 부쩍 밀려오니 말이다.
오늘도 불 켜진 창이 안부를 전해준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뭐 해? "
"어~~ 엄마 TV 보고 누워있다~"
"저녁은 먹었고?"
"어~먹었어~"
"알았어... 그럼 계속 TV 봐 "
"어~고마워~"
이렇게라도 불빛이 비치는 창문과 간단한 안부 대화를 해본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나이 한살이 택배처럼 문 앞으로 배달이 되어왔다.
엄마 집 창문의 불빛에도 1년의 시간이 더해졌다. 묵직하고 더 힘들어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보는 한, 그 창의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조심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