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떼 가득 묻은 빛바랜 노트들이 꽤 된다. 수첩이라 하기엔 공책 같아서 노트라고 말하는데, 2016년부터 써왔으니, 몇 권이 됐다. 그렇다고 엄청 꼼꼼하게 빼곡하게 그 모든 여백을 다 쓴 것은 아니지만, 내 성격에 맞게. 나라는 사람의 성향에 맞게 나름 잘 사용해왔다는 생각이다.
노트의 용도는 내겐 하나가 아니었다. 일기장도 되었다가 잊지 말아야 할 메모지들을 듬성듬성 붙여놓기도 어떤 페이지에는 숫자들이 가득 적혀있는 걸 보니 계산기이기도 했다. 어느덧 12월이 성큼 다가오고 있자니, 책장에 꽂혀있는 지난 나의 기록들이 눈에 밟히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세보니 4권이었다. 색깔은 검정에서부터, 빨간색, 흰색, 반짝이는 형광의 은색 이렇게다. 얇은 수첩은 쩨쩨해 보여 잘 안 쓰는 성미에 늘 두꺼운 노트를 사용했다. 냉큼 하나를 집어 들고선 소파에 앉았다. 정확히 말하면 2015년 12월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던 반짝이는 형광 은색 표지의 노트였다.
내겐 애정 가득한 노트이기도 한데, 퇴사 직후 나의 고민과 다짐들, 그때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일기처럼 고스란히 적혀있다. 그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해 그 겨울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어머머,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어?흠칫 놀라기도 여러 번이다
말은 아주 좋았다. 므흣. 그때의 다짐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니.하고 미소 짓는다. 오랜만에 천천히 페이지 한 장 한 장 채 마르지 않은 잉크가 묻은 종이를 넘기듯 조심스레 읽기 시작했다. 딸이 혼자 사는 집에 왔다가 나 몰래 내 노트에 오만 원권 두 장을 넣어놓고 간 엄마, 내 사랑 조카가 태어난 날 내가 조카에게 쓴 편지까지. 셀 수 없이 작고 소소한 나의 일상과 삶이 역사 속의 한 페이지처럼 담겨있다.
이런 물건과 감성은 내게 귀하디 귀하다. 어디 금반지와 다이아몬드와 바꿀 수 있으랴. 내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추억하는 일.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
내 노트 어느 페이지에 오만 원권 두 장을 넣어놓고 간 엄마가, 어릴 적부터 엄마 품을 떠나 멀리 떨어져 산 딸이 가질 마음들에 아파하며 그 아픔을 뒤로한 채 내 집을 떠났을 엄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바르셀로나의 바르셀로나타 해변가에 홀로 앉아 저 멀리 출렁이는 파도와 갈매기 떼들, 나를 향해 비추는 찬란한 겨울의 햇살을 온몸으로 마주하던 그때 적었던 나의 일기도 새삼 눈물짓게 했다.
겨울을 타는 건지. 요즘 왜 이리도 내 마음은 추억을 그리기만 하면 눈물이 나는지. 갱년기가 오려면 아직은 시간이 꽤 남은 것 같은데 말이다.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난 나의 시간들이 자필로 적힌 노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내년도 미리 준비할 겸 나의 취향이 담긴 노트 하나 새로이 장만하고 싶어졌다.
노트를 읽다 눈물을 훔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다 생뚱맞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만다.
참 도도한 것 같으면서도 생뚱맞고 허당인 나. 이마저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느낄 만큼 여유가 생겼다. 이번에 장만할 노트는 역시나 내 마음에 쏙 드는 걸로, 노트에 만큼은 작은 사치를 부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