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6년 정도 쓴 노트북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가볍고 타이핑 감도 좋고 짙은 핑크색이었던 노트북은 꽤 오랜 시간 나와 함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원이 켜지지 않더니 고장이 났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새 노트북을 알아봤다. 내가 생각한 예산보다도 훨씬 웃도는 가격에 어쩌지. 싶었다. 원래 용량이나 메모리나 기기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얕기도 하고 도통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어서 노트북을 고르는 기준도 단순했다. 가벼울 것. 문서작성 및 인터넷 리서치면 오케이. 딱 이렇게. 원래부터도 로고나 브랜드도 중요하지 않았으며 디자인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시절 쓰던 작고 실용성 갑이었던 넷북. 이 떠올랐다. 지금도 넷북이 있나.라는 생각까지. 가성비 좋은 노트북들도 쨌든 최소 60만 원은 줘야 했다.
엇, 잠시만. 예전에 사놓고 한 번도 안 쓴 그 노트북 참 어딨지? 찾았다! 수납장 위에서 노트북 가방 하나를 꺼내와 중세시대 귀한 서적을 발견해 먼지를 벗겨내 듯 조심스레 열었다. 10년 전에 샀던 검정 노트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에는 핫했던 최신 노트북이었다. 단점이라면 무게감뿐이었고 전원을 켜보니 당장 사용해도 전혀 문제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신입행원 시절 집에서 온라인으로 금융 강의를 들을 용도로 장만했던 거였다. 사놓고 어떻게 한 번을 안 썼을 수가 있었지. 내가 이렇게 이제 와서 너를 쓰려고 이랬나 보다. 했다.
내 생각은, 이거면 됐다. 였는데 사실 이 노트북이 없었다면 난 고민 없이 새 노트북을 당장 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노트북이 살아 있으니 이 녀석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고 기존에 썼던 노트북보다 훨씬 튼튼하고 야물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 무게감에 가지고 다니기엔 대단히 무리수가 있다는 건데, 정말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고 싶을 땐 한동안 그 무리수를 감수해가며 잘 가지고 다녔다.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할 때도 훨씬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차를 판지 얼마 안 된 시기와도 겹쳐 난 이 녀석을 데리고 늘 버스를 탔다.
어깨 빠질 것 같으면서도 든 생각은, "와, 나 진짜 이렇게까지..." 내 선택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대학시절부터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나 발라드를 들으며 커피 한잔과 함께 넷북이나 노트북을 켜놓고 자기소개서며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그 습관은 여전하다.
카페에 가면 저마다 로고가 박힌 최신 노트북들을 많이 보는데 그 한가운데에 있던 내 노트북은 별 나보이긴 했다. 가끔은 사람들이 골동품 보듯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사용자인 나는 내 노트북이 전혀 창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감성을 아십니까?"라고 되묻듯 키보드를 더욱이 야무지게 눌러댔다.
내 스스로도 놀라웠던 건, 가운데 사과 모양에서 나는 흰색 빛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나와 내 노트북은 음메 기죽어. 는커녕 위풍당당했다는 건데, 그 조차도 얼마나 유니크한가. 멋지지 않은가. 아무렴 어떤가. 겉모습이 다가 아니란 말이지. 오히려 그런 게 본래 나 같아서, 나 다워서 자연스러웠다.
이 녀석과는 어느새 큰 정이 들어버렸다. 이 녀석을 선택했던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때의 키보드가 겉보기엔 둔탁하지만 찰싹 내는 소리도 요즘 것과 비교해도 손색없고 느낌 있고 감성까지 있다는 사실이다.
주변에선 그냥 노트북 하나 사. 안 무거워? 들고 다니는 게 더 힘들겠다. 필요한 건 사야지. 이런 게 청승이지...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가끔 낑낑대며 들고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노트북을 살 돈이 없어서는 전혀 아니고, 여전히 제 기능을 완벽하게 다 해내고 있는데 단지 무겁다고 해서 유일한 그 단점 하나 때문에 이별을 선언할 수 없다는 이에 대한 내 소신 때문이다.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 아닌가. 장점이 열개 스무 개 있는데 단점 하나 때문에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10년 된 이 노트북은, 이 녀석이 가진 치명적인 매력이 그 무게감에서 오는 치명적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결론이다.
무게감과 둔탁함은 의외로 내가 힘을 주어도 중심을 잡아줌으로써 또 타이핑 침으로써 맛깔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역할까지. 이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우니 이 녀석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좋은 점만 바라보려고 하니, 예쁜 점만 보려고 하니, 한 없이 예뻐만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 단순한 진리가 내 노트북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자 역시 결국은 사랑인 건가.싶다.
10년 전 이 녀석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아주 잘 쓰고 있어서 그런지 새것 같던 노트북도 어느새 빈티지스러워질 지경이다. 노트북 겉엔 친구가 날 쏙 빼닮았다고 준 고양이 캐릭터 제시카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내 노트북과 관련해서는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없고 순조롭다. 너는 내게 언제라도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할 순 있겠지만 나는 결코 내가 먼저 네게 이별을 선언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