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엔 항상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언니들이 많았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난 언제나 언니들과 함께였고 그게 편했고 참 좋았다.(개인적으로 친구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겐 언니들도 친구다.
언니들도 늘 "우리 초아는 진짜 동갑 같아..." 혹은 "친구 같은 동생"이라고 날 곧잘 소개하곤 했다. 언니들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고 멋모르던, 세상 물정이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채 통통 튀다 못해 분신술을 사용하듯 제멋대로인 날 다행히도 귀엽게 예쁘게 바라봐줬다. 때로는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칭찬과 애정을 아낌없이 내게 주던 내가 사랑한 언니들이다.
#유연 언니. 는 은행 입사동기다. 나보다는 5살이 많은 언니는 아름다운 용모에 긴 머리는 언니의 트레이드 마크다. 입사 첫날, 너무 예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언니와는 처음부터 말이 너무 잘 통했다. 서로 마치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친구 할래?"라고 말하듯 우리는 운명처럼 인연처럼 그렇게 완전 절친이 됐다.
마포역 맥도널드도 언니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언니와 매일 같이 번개를 그곳에서 했으며 우리는 꼭 700원짜리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마포역 쟈스 커피도 우리의 아지트였다. 매일 보아도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우리의 헤어짐의 끝엔 늘 "우린 어쩜 한 말 또 하고 또 해도 늘 새롭니?"였다. 그랬다. 우리는 이미 한 말을 지겹도록 마치 처음 듣는 듯 들어주고 얘기했다. 그게 우리였다. 언니와 함께한 서울시내 곳곳에서의 추억은 거짓말 조금 보태 셀 수 없을 정도다.
저녁 약속을 한날이면 우리는 꼭 광화문 교보 안에서 아니면 스타벅스 광화문 D타워점에서 만나 이동했다. 각자의 회사에서 불과 2-3분 거리였다는 게 컸다. 흔한 찐친이라는 표현 말고 더한 것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남다르게 표현하고 싶을 만큼 언니와의 우정은 남달랐고 소중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 홀로 사는 나에게 언니는 내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언니는 늘 날 위로했고 다독였고 안아주었다.
부르면 한 걸음에 달려와 준 것도 언니였다. 한 번은 갑작스레 아주 중요한 면접이 하루 전날 잡힌 터였다. 언니는 대뜸, "너 내일 입을만한 옷 있어?" 언니는 수화기 너머 없다는 내 목소리를 듣고선 그 길로 그 늦은 밤 정장 두 벌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난 언니의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 감동해서 눈물을 뚝뚝 흘려 보이며 옷을 입어보았다. 언니의 응원 덕택에 덜컥 합격했다는 것까지. 누구보다 기뻐해 줬고 그날 언니와 그랑서울 지하에서 치킨을 뜯으며 축하했던 기억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생일을 늘 챙겨준 것도 언니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겨울날, 내 생일에 언니와 성수동으로 커피소년 콘서트에 갔던 일도 선명하다. 노래를 듣다 눈물을 훔치다 그러다 서로 쳐다보다 왜 이리 청승이니. 하며 울다 웃던 그날의 기억... 이어 장가갈 수 있을까. 를 시집갈 수 있을까.로 바꿔 부르는 커피소년에 우리는 고상한 척은 온데간데없고 고레 고레 따라 부르던 기억까지. 언니에게 항상 고맙고 또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다. 언니가 유독 많이 보고 싶은 오늘이다.
#윤아 언니. 언니는 내가 지점 근무 당시 내가 아닌 다른 파트에서 업무를 종종 보다 나가던 스치듯 마주쳤던 고객이었다. 어느 날 언니가 대뜸 내게 다가왔다. "은행원 같지 않아요... 너무 예뻐서 놀랐어요(이해 요망하는 문장이다. 허나 워딩 그대로였다는 게 사실이다). 궁금해요. 나중에 시간 될 때 커피 한 잔 할래요?"하고 연락처를 주고 갔다.
사실 나도 언니가 궁금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긴 생머리에 무용을 전공한 듯한 호리호리한 몸매에 고상하면서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언니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커피를 함께 마시게 됐고 그날로 바로 절친이 됐다. 친해지는 데 혹은 깊어지는 데는 지내온 시간 보다도 어떨 땐 그 농도라는 데 동의한다.
언니는 나보다 6살 많았고 사업가였다. 셈에 빨랐고 돈에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오래전, 지금 회자되는 파이어족이라는 말을 그때 언니를 통해 줄기차게 듣곤했다. 줄곧 내게 부동산 투자에 대해 역설했음은 물론이고 주말이면 지방으로 내려가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게 언니의 취미이자 낙이었다.
언니는 늘 바빴다. 그럼에도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며 파스타며 소스며 먹을 것이 한가득 든 봉지를 내 집 앞에 놓고만 간 적도 있다. 언니의 결혼식에서 부캐를 받았던 것은 물론이고 "초아야, 오늘 점심때 회사 앞으로 올 수 있어?" 하면 난 쪼르르 을지로 언니의 오피스 빌딩 앞으로 갔다. 그러면 언니는 점심에 커피까지 사 먹이고서야 보냈다.
삶은 화려하지만 언니의 옷은 죄다 오래된 것이었으며 돈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니의 부를 드러내는 거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했다. 난 그런 언니가 좋았고 그런 언니를 통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언니에겐 딱 한 가지 언니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게 있었는데, 삶에 대해 철저히 회의적이고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었다는 점이다. "초아야, 언니는 그렇게 삶에 미련이 없어. 그냥 하루하루가 어떨 땐 고통스럽고 힘이 들어. 사랑? 사랑도 글쎄. 내가 아이를 안 낳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나는 내 아이가 내가 살아온 이 세상에서 내가 느꼈을 감정을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곤 했다.
난 그런 언니에게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그렇게 언니를 알아가고 이해해가고 있었다.
내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정과 애정을 가르쳐 준 언니들은 언제나 날 있는 그대로, 그게 초아 너야!.라고 말해주었다. 내 삶에서 이 두 언니를 빼고는 그 시절의 초아. 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언니들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방황하던 내게, 도통 갈피를 못 잡던 내게 유연 언니는 "초아가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 "초아야, 너의 모든 경험이 널 값진 아이로 만들어 줄 거야!"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주었다.
언니들은 내 삶 힘든 고비고비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내 옆에 있어주었고 그런 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용기 주었고 대여섯 어린 동생을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내겐 분명한 확실한 귀인인 언니들에게 내 사랑 가득 담아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하트 뿅뿅을 날리고 싶은 오후다. 내가 사랑한 언니들에게 초아가.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