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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램 May 10. 2023

큰 딸은 아빠를 닮는다

큰 딸은 아빠를 닮는다고 했던가.

엄마랑 같이 다니면 엄마를 닮았다는 얘기를 듣지만,

아빠랑 같이 다니면 "아 엄마보다 아빠를 더 닮았네"라는 소리는 듣는 편이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이목구비에 그리 강렬한 포인트가 없다는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은 든다.


확실히 아빠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발달한 허벅지와 종아리.

여리여리한 팔다리를 동경했던 나는 아빠가 나에게 왜 이런 유전자를 전달했는지 평생 원망해 왔다.

남동생은 엄마를 닮아 가늘고 반듯한 종아리를 가졌는데

나는 딱 봐도 튼튼해 보이는 '무다리'로 평생을 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복치마 아래에 굵은 종아리가 그렇게 싫었다.

친구들과 비교되는 굵고 허연 다리가 싫어서 매일 맥주병으로 밀기도 했는데 효과는 없었다.

한창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던 20대 시절, 전체적인 사이즈는 줄어들긴 했지만

타고 난 체형이 있는지라 가늘고 예쁜 다리로 바뀌진 않았다.  

바지를 고를 때는 항상 허벅지 사이즈를 신경 쓰며 구입해야 했고

치마도 늘 긴치마만 입거나, 스타킹을 신어 다리 노출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30여 년을 살아왔는데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아빠가 물려준 다리에 감사하게 되었다.

평발이라 달리기에 그리 좋지 않은 조건이지만, 종아리가 워낙 튼튼해 충격을 잘 완화시켜 주었다.  

덕분에 아무리 오래 걷고 뛰어도 쉽게 피곤해지지 않는 편이다.

달리기를 시작한 초반엔 피로가 누적되어 무릎이 안 좋아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발달된 다리 근육 덕분에 자세도 교정하고 훈련하다 보니 금세 회복되었다.

이제 쉬지 않고 10킬로 정도를 뛰는 건 별 무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빠 국민학교 시절에 계주였다고 했었지.

시골 국민학교에서 얼마나 빠른 선수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매일 몇 리길을 통학하고 다녔으니 오래 걷고 달리는데 여러모로 특화되었음에 틀림없다.

덕분에 나도 그 다리를 물려받았고.  


얼마 전 10K 대회를 끝마치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최고 기록을 세운 날이라 신이 나서 달리기 대회에서 156등 했다고 하니까.  

아빠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했다.


"아니 넌 그렇게 운동하기 싫어하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냐?"


어쩌면 이것은 아빠로부터 큰 딸로 전해진 유전자가 만든 나의 운명인 듯하다.

물려받은 튼튼한 다리로 다리를 건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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