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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램 Apr 14. 2020

이 청바지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

옷장 정리 1


옷장을 정리하면서 가장 많이 버린 것 중 하나는 청바지였다.

죄다 인터넷 쇼핑으로 사놓고 실패해서 입지 못하는 청바지들이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나는 항상 나를 뚱뚱하다고, 특히 다리가 굵다고 생각해왔다.

때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책상 옆쪽으로 다리를 삐죽 내놓고 있었나 보다.

담임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램램아, 다리 똑바로 하고 앉아”라고 얘기하자,

교실 어딘가에서 “ㅋㅋㅋ 족발 ㅋㅋㅋ”이라는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렸고,

반 전체가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다리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엔, 교복 스커트 아래 내 종아리가 너무 하얗고, 굵기만 해서,

날씬한 아이들의 다리를 부러워하며 맥주병으로 수십 번 밀어 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옷가게에서 바지를 산적이 별로 없다.

저 바지를 입고 피팅룸에 들어가면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꽉 끼는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옷가게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입는 바지는 손에 꼽았다. 내 다리가 들어가는 바지라면 주구장창 입었다.

그런 바지는 세상에 흔치 않을 테니까,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서 인터넷으로만 바지를 샀다.

택배를 뜯고, 바지를 입어보고, 들어가기만 하면 땡큐였다.

하지만 다리가 들어가긴 해도 핏에 따라 영 보기 좋지 않은 바지들도 많았다.

그런 바지들은 버리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쌓아뒀다.

이번에 옷장 정리를 할 때 바로 이 청바지 무덤도 대대적인 정리대상이었다.

나는 각오를 하고  죄다 한 번씩 입어보았다.  

수십여 번의 입고 벗기가 끝난 후 건진 것은 딱 4벌이다.

내가 입었을 때 편한 것, 핏이 좋은 것만 남겨두었다. 청바지 무더기를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청바지에 집착했는지, 바지를 왜 직접 가서 입어보고 사지 않는지 좀 슬퍼지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가끔 명백하게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잘 삼켜내야 그 어리석음을 현명함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바지를 인터넷으로만 사는 나의 어리석음(트라우마와 수치심에서 시작된)을 이번 기회에 털어내기로 했다.


족발남아, (나는 네 녀석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니가 던진 농담 덕분에 나는 평생 내 몸을 수치스러워하며 살았단다.

어린 소년이라고 해서 다 용서가 되는 건 아니야.

나는 평생 널 용서하지 않겠지만, 그 분노를 내 몸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해.  상처 받았던 초등학생 나한테 괜찮다고 말하며 당당하게 내 몸을 사랑할 거야.


아직도 교실에서, 세상에서 타인의 몸을 잣대질 하고, 조롱하는 여전한 '소년'들에게 이 노래도 바친다.


Boys Will Be Boys _ Dua Lipa




소심한 미니멀리스트의 팁!

어리석은 쇼핑이나, 선택 (가령 입지도 않는 수십 벌의 청바지처럼)에는 알고 보면 나만의 이유가 있다.  이유를 직시하고, 풀어보자. 앞으로  나은 선택들을 만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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