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램램 Dec 05. 2021

나머지 수영의 기억

비릿한 추어탕 냄새, 빨간 고무 다라이 속 미꾸라지들, 아스팔트의 열기.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난 추어탕 집 앞에서 '홍익 스포츠 센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오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멍하니 추어탕 집 앞 미꾸라지들을 보다가

혹시 버스가 나를 두고 갈까 불안해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염소 냄새, 웅웅 울리는 소리, 파란 물, 축축한 공기.      

수영장에 도착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모와 물안경을 챙긴 뒤, 열심히 준비운동을 한다.

몇 번의 수업이 지나도록 물 위에 뜨지 못하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다들 알록달록한 킥판을 들고 레일을 오갈 때 나만 수영장 한 구석에서 선생님과 특별 수업을 했다.

선생님은 계속 "다리를 곧게 펴고 발차기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고 했지만, 몸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리를 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자꾸 물아래로 가라앉고, 발끝은 버둥버둥 수영장 바닥만을 찾았다.

집에 가서 이불에 엎드려 혼자 발차기 연습도 해봤지만 수업 시작과 동시에 꼬르륵 물 밑으로 가라앉던 나는 늘 수영장 구석으로 불려 갔다.      



매번 나머지 수영만 하다 보니 수영장 가는 날이 너무 슬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땡땡이치는 법도 모르던 아이였던 나는 매번 추어탕집 앞에서 잔뜩 구겨진 얼굴로 서있었다.

그날도 같은 날이었다.

매일 물속에 몸을 담그다 보면 몸과 머리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일까?

단지 물을 이해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더 필요했던 것일까?

그날따라 왠지 어깨에 힘을 풀고, 다리에 살짝 다르게 힘을 주자 물이 내 몸을 둥실 떠올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은 "바로 그거야!" 라며 처음으로 기쁜 목소리로 나를 응원해주었다.  

드디어 다른 친구들과 같이 레일을 따라 수영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붙어 수업 없는 날엔 혼자 '자유수영'도 가곤 했는데, 어떤 아줌마는 나를 붙잡고, 어쩜 그렇게 수영을 잘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방학 이후, 나는 수영하는 법을 까맣게 잊었다. 엄마는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수영 학원에 그만 가도 좋다고 했다. 가야 할 다른 학원도 많았으니까. 그때도 겨우 물에 떠서 앞으로 나가는 것만 배운 것이라 자유형이나, 평영 같은 영법은 전혀 할 줄 몰랐다.

어른이 되어 스쿠버다이빙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고 나서야 여전히 물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갑자기 얼굴로 밀려드는 짠 물, 발아래 20M 깊이의 바다가 있다는 사실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 나는 인스트럭터 멱살을 붙잡고 못하겠다고 울며 불며 소리 질렀다. 그러자 인스트럭터는 천천히 고개를 바다에 넣어보라고 말했다. (버둥거리는 내 뒷목을 잡고 밀었던 것 같기도 하다.) 수직으로 있던 고개를 수평으로 옮기자 황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커먼 바닷물 아래 알록달록한 산호초와 멋진 물고기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따라 몸을 수평으로 누워 인스트럭터 손을 잡고 바다 밑으로 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오리발을 휘저으며 고요한 바다를 유영했다. 입수할 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게 다이빙을 마쳤다.     

 

물에서 걷는 법은 육지와 반대다. 수직으로 서있는 몸을 수평으로 눕혀야 하고, 발에 힘을 주는 대신 물살을 따라 다리를 천천히 저어야 한다.

코 대신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하고, 목소리 대신 내가 내는 숨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물속에서는 왠지 다른 생명체가 된 느낌이 든다.      


자연스럽게 물의 규칙을 체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물의 규칙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두려움에 압도되어 몸의 기억을 새하얗게 날려버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은 아주 작은 계기로 마법이 풀리듯 움직이기도 한다.       


어깨의 힘을 풀고, 바닷속에 안긴 순간, 백설공주의 키스처럼 ‘반짝’하고 물속을 움직이는 법을 기억해냈다. 몸에 새겨진 물과의 기억은 두려움을 새로운 경험으로 바꾸는 법을 알려주었다. 뭉갈이의 몸속에 습관처럼 새겨진 또 다른 두려움과 걱정들도 천천히, 마법처럼 새로운 경험으로 바뀔 수 있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회가 싫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