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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Jan 19. 2021

홍성의 밥상

성의 있는 밥상에서 본 지중해의 선셋

* 2020년 6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홍천엔 스키장이 있고 횡성엔 한우가 있건만 홍성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난 주말 기차로 이동해 점심 즈음 도착하게 된 홍성. 난생처음 밟아 본 홍성 땅에서의 첫 일정은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시작되었다.

멀리까지 왔는데 허접하게 배를 채우고 싶지는 않고 지역 특산물을 먹어보고는 싶은데 점심에 한우를 먹자니 몸이 부대낄 것 같아 속 편하게 한정식을 선택한다.

"어서 와유~"

시골 밥상을 기대하며 자리에 앉는다. 밥상 위에 전지를 깔아주는 것부터 심상치가 않다. 흔히 잔칫상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라 살짝 생경하긴 했으나 목적은 오로지 식사이니 그저 잠자코 기다린다. 전지를 깔고 그 위에 수저통을 올려놓는 사장 아저씨의 손길엔 나름의 철칙과 고집이 있어 보인다. 주문을 한다. 깔고 앉은 방석 위에서 서울과 다른 속도를 느낀다. 기다린다. 이 속도라면 일행 다섯 인분의 반찬들을 담아오기에 시간이 조금 걸리리라. 배고프다. 그래도 반찬 먼저 나오겠지? 기다린다. 밥이 준비되면 한꺼번에 주시려나? 기다린다.




카트에 요염하게 앉은 여러 반찬들이 나름의 비장함을 품고 행차한다. 도토리묵, 잡채, 그리고 여러 나물들. 애피타이저는 아무래도 도토리묵이지. 상추와 함께 버무려진 도토리묵무침을 한 젓가락 집어 들고 입으로 직행한다. 어맛, 입으로 들어가기 전 콧구멍이 먼저 감지해버린 진한 들기름 향이라니. 하.. 진짜가 나타났다. 진짜, 레알, 찐 양념. 콧구멍을 들이밀다 못해 얼굴을 도토리묵무침에 파묻을 뻔했다. 이게 뭐라고 나는 이 순간에 행복에 겨워하고 있나. 거짓 없는 재료와 진솔한 손맛이 더해진 성의 있는 음식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이제야 경험하게 된 제대로 된 음식의 향연이라니.

잡채, 버섯볶음 등과 같이 재료와 맛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것보다 입으로 맛보고 뜯고 씹지 않는 이상 예상하기 어려운 음식에 먼저 젓가락을 가져간다. 모양과 색깔이 골뱅이와 비슷하고 빨갛지만 어딘가 와인빛이 나는, 요염해 보이면서 새초롬해보이기도 한 작은 조각의 무침을 맛본다. 예상하지 못한 소스 맛을 느낀다. 요염한 색에서 알아챌 수 있어야 했는데 새콤한 과일의 맛. 이건 뭐지? 주 재료는 고동인데 아삭하게 씹히는 아주 작은 큐빅 형태의 것이 함께 버무려져 있다. 씹히는 식감은 생감자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무는 아닌 것 같고, 요 앙증맞은 것을 요리조리 살펴가며 양념을 물에 헹궈도 보고 그 정체를 파헤치려고 신성한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셜록 홈즈가 된다.

밥도 나오기 전에 정신없이 먹어대느라 레이더가 꺼지지 않는다. 세상에 어쩜 된장국도 때깔이 다르네. 진하고 묵직하게 흙색을 띄는 것이 리얼 된장이다. 역시 서울과 달라. 서울에서 비싼 돈 주고도 절대 맛볼 수 없는 고퀄 한정식.


"궁금하니께 한 잔 마셔봐야쥬~"


일행 중 한 분이 동동주를 시킨다. 지역마다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이 제각각 다르듯 술도 지역에서 생산됐다면 그 맛 또한 다르리라. 술잔에 고즈넉하게 출렁이고 있는 말갛고도 말간 동동주를 보고서야 그동안 내가 마셔댄 동동주에 대한 배신감이 물밀듯 밀려온다. 나는 분명 동동주와 막걸리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거늘 왜 다른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그동안 퍼마신 전통주를 비판의식 없이 대했단 말인가. 똥 멍청이로 자책하며 지난 음주의 시간을 반성한다.




홍성에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나 홍성의 밥상 앞에서 나는 계획에 없던 목적을 이미 달성한다. 이대로 집에 가도 괜찮다며 이후 일정에 대한 미련을 일행들에게 떨쳐 내보였다.

성의 있는 밥상이란 자고로 음식에 들어가는 원재료와 그 재료를 재료답게 북돋아주는 양념들, 그 수많은 가짓수의 앙념들 중 어느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고 진솔하게 버무려진, 나대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 겸손 같은 게 아닐까? 우리가 생을 살아가는 도중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완벽히 내 마음이 데워지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날 도토리묵의 진한 들기름 향과 고동무침에서 맛 본 지중해의 선셋과 같은 여운이 싸구려 기차여행으로 뻑적지근했던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위로했다. 어제의 하루에 실망했더라도 아무래도 괜찮다며 오늘의 내가 위로한다. 이 정도면 충분해.

조개 속 진주알처럼 박혀있던 고동무침 속 작은 큐빅의 정체를 식사가 마칠 때까지 궁금해하며 고이 아껴 둔다. 나가는 길에 여쭤보니 아삭하게 씹히던 그 작은 보석은 콜라비.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홍성에서의 식사를 여운 삼아 오늘의 하루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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