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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Jan 12. 2022

버리고 떠나기

남겨진 생에 대한 예우

온갖 물질로부터 구속을 느끼고는 버리기로 작정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한 트럭 분량의 옷을 버린 이후(물려주거나 기증하거나 진짜로 버리거나)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면 내가 그 옷을 왜 버렸을까 생각하며 한동안은 뒤끝 있는 모습을 보였다. 버리고 떠나기 입문 단계라고 치자. 줬다 뺐고 싶은 구질구질한 과도기를 거쳐 현재는 무無로 돌아가자 마음먹은 중간 단계쯤 된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의미 부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기록된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 다짐한 상태이다. 새해가 되면 의식처럼 행해오던 다이어리 구입도 이제는 덧없다 생각한다. 기록된 개인의 역사는 남겨진 타인에게 골칫덩이일 뿐이다. 남아있는 보호자가 없다면 더욱이 그러하다. ​


물건의 개수는 살아온 생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생을 함께 해온 소중한 물건이 값으로 매겨지는 순간 지나온 생은 그저 헛헛하기만 하다. 물건을 정리하는 매 순간 그 헛헛함에 아쉬움이 더해져 변덕을 부린다. 내 인생을 증명하는 악보들이 헐값에 매겨질 때 그간 살아온 인생이 같은 값으로 매겨지는 것 같고, 아끼던 악기를 헐값에 입양 보낼 때 아쉬움과 후련함, 그리고 아까운 마음이 교차한다. 더 비싸게 부를걸 후회하며 진정으로 버리고 떠날 생각이 없는 듯 굴기도 한다.

소유하게 된 모든 물건은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선택했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선물 받았고,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내게 왔다. 그러나 빛을 받지 아니한 모든 물건은 여기 왜 있는지 존재 이유를 알 수 없고, 처음 맞이했을 때의 그 마음을 상기시킬 수 없으며, 구식이 되어버린 시대의 흐름이 야속할 뿐이다.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이 모든 감정은 거추장스럽다. 나는 지금 남겨진 생을 예우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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