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퍽한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윤활제가 필요하다. 과열을 막고, 마찰을 줄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작동을 돕는다. 그 중요성을 깨닫는 건, 보통 없을 때다.
딸아이가 작년에 HSC(한국의 수능시험)를 치렀다. 시험이 끝난 후, 날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며 처음엔 모른 척했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어야지.’ 문을 조용히 닫으며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런데 하루이틀이 아니라 한 달 가까이 이어지자, 참았던 짜증이 올라왔다. “이제 슬슬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말은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속마음은 부글거렸다. 호주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은 보통 14~15살부터 시작한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노동의 가치를 알아가는 일을 소중히 생각하는 곳이다. 대학 입학을 앞둔 딸이 사회 경험을 조금이라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딸은 지인의 권유로 병원에서 **PSA (Patient Service Assistant)**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날마다 하는 일이 아니고 일을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거라 공부하는데 큰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큰 장점이었다.
모든 직업군이 다 중요하지만 PSA는 병원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환자 이동, 병실 정리, 소독, 심지어 세상을 떠난 환자를 안치실까지 모시는 일까지 맡는다. 말 그대로 병원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돕는 ‘윤활제’ 같은 역할이다. 없으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문제는, 딸이 이런 험한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화장실 청소? 병실 정리? 심지어 고인을 모시는 일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딸은 생각보다 잘 적응해 나갔다.
어쩌면 내가 더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민 1세대인 나는 다소 거친 환경에서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딸은 태어나 보니 호주였고, 까만 머리이니, 그만큼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더 강했으면 했다. 이제 막 시작한 대학 생활을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삶의 무게를 조금씩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걸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부모는 자식과 영원히 함께할 수 없으니까. 대신, 미리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것, 그리고 조용히 꼭 안아주는 것 그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윤활제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도, 나도. 마찰을 줄이고, 부드럽게 굴러가도록 돕는 것.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