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신발을 버리시나요/김선호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는 저장강박증이 있는 건 분명 아니다
그런데 신발은 왜 잘 버려지지 않을까
신발장을 열고 하나씩 둘씩 들여다 본다
안 신고 쌓아두는 신발이 가득하다
정리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유독 신발만 그대로 둔다
바닥에 구멍이 난 건 아닌데 돌기가 다 닳아서 비 올 때 신으면 멋진 빌딩 앞의 대리석 바닥에 찔떡 미끄러져 깜짝 놀라고는 집에 가서 당장 버리겠다고 마음먹기 일수인 로퍼도 있고
코가 다 깨져서 볼품 사나운 구두도 있고
바닥 쿠션이 다 주저앉아서 딱딱해져버린 슬립온도 있고
옆에 달린 지퍼가 멋있어 보였지만 목이 높아 신으면 왠지 불편한 부츠도 있고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제화점 상품 사줘야 한다는 대학 동문의 권고로 사서 잘 보관만 하는 수제 구두도 있고
디자인이 올드해서 한쪽 구석에 덩그마니 쳐박혀 있는 신발도 있고
발뒤꿈치를 잡아주는 프레임이 틀어져서 신으면 좀 이상한 운동화도 있고
한 치수 작은 신발이 모양도 예쁘고 신으면 점점 늘어난다는 점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꼭 끼는 신발 산 덕에 신기만 하면 발뒤꿈치 까지는 구두도 있고
신발의 사연 때문일까
신발가게 지날 때 두리번 거리면 하나 씩 사주는 마누라표 신발
잊혀져도 벌써 잊혀진 옛 애인이 사준 조금은 비싸 보이는 구두
신발 사주면 그 신 신고 도망간다는데 지가 먼저 도망갔다
인터넷 뒤지다가 팝업 광고를 보고 충동 구매한 슬립온
팝업이 문제일까 내 사상이 문제일까
여행 간다고 여행용 신발로 사서 쳐박아 둔 로퍼
그 로퍼를 보면 지난 여행이 떠오르기나 하나
오늘은 종량제 쓰레기 봉투 큼지막한 것 하나 사서 신발이나 정리해야겠다 그러다가 인생도 정리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