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호 Sep 10.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2


잣나무 옆 언덕 아래에는 지하실이 하나 있다. 이 곳은 석축을 쌓아 만든 것으로 여름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입구를 막을 정도이다. 평상시에는 발목까지 오는 풀 섶을 밟고 지하실로 들어서면 서늘한 냉기가 진혼의 춤을 추듯 들어오는 이의 몸을 으스스하게 감싸 안는다.


여름에는 냉장고 대신 이 곳에 음식을 보관했는데 지하수가 차올라서 모기들도 꽤나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끔은 개구리들이 여러 마리 모여 운동회를 하는지 반상회를 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자맥질을 하고 아주 난리를 치기도 한다. 한편 이곳이 겨울에는 또 아주 따뜻한 온기를 품는다. 추위에 떨다가 따뜻하게 안기는 애인의 품처럼 포근하고 편안하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그저 훈훈한 느낌 그 정도이다.



어느 시골집이나 다 그렇듯이 공동 우물이든 개인 우물이든 하나씩은 있다.  이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닭장 옆에 깊이가 10미터는 족히 되는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은 아마도 사람들이 그 속에 대고 소리 지른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문간방 박씨가 가끔 마을 어귀 과부집에 들락거리던 이야기, 또랑 옆집 아줌마가 읍내 어떤 놈하고 눈 맞아서 집 팔고 서울 간 이야기, 관상쟁이 나씨는 성깔이 아주  고약하고 치뜰다는 이야기, 손재주 뛰어나서 목수로 풀린 아들을 고등학교 진학 안 시킨 건너 집 부부의 후회스러운 한숨 소리, 이 집 저 집서 돈 꾸어다 쓰고 야반도주한 교회 옆집 김 씨 이야기 등이 우물 속에 남아있다.


이 우물은 처음 공사를 할 때 너무 깊이 파서 십 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그래서 동네 우물이 마르면 아낙네들이 말 죽은 데 까마귀 모이듯이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 때는 두레박  끈이 너무 길어서 불편하기도 했다. 또 일 년에 한 번 청소할 때면 인부도 엄청 불러야 했다.


 우물의 영혼이  살아있는 시퍼런 이끼 옷자락에  마대를 걸쳐놓고 대여섯 명의 장정이 달라붙어서, 천정에 매단 어린애 머리통만 한 도르래에서 주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럼통으로 물을 퍼내면 반나절이 지나 우물은 그 배를 드러낸다. 그리고 젊은 장정 두 명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나온 것들은 서노를 아주 당혹스럽게 한다. 연탄집게, 연장, 밥그릇, 사기 조각, 돌멩이를 비롯해서 아무튼 서노가 풍덩풍덩 소리를 즐기며  던져 넣은 것들이다. 맞아 죽을 만큼 혼나야 하는데 서노의 할머니는 아무 말씀을 아니하시고는 쯧쯧 혀를 차시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할머니가 경을 치시는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었다.


서노는 우물에 머리를 박고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들려오기 때문에 자주 그 짓을 했는데, 잘못하면  우물에 빠진다고 할머니가 그것 만은 못하게 하셨다.


 어쩌면 우물 속  메아리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상의 스틱스 강을 건넌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서노는 느꼈는데 말이다. 그때는 그것이 또 다른 서노 영혼과의 저급한 교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길 건너 우물에서는 그러다가 빠져 죽은 아이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죽은 아이들 원통함을 달래려고 바닥을 드러내고 물을 말려버리는지도 모른다.

 


우물과 가까운 거리에는 메주덩어리 만한 흙벽돌로 쌓은 토담과 철망으로 된 비교적 큰 닭장이 있다. 닭장 안은 닭만 있는 것은 아니고 겨우내 쓸 장작도 보관한다. 서노는 가끔 밖에서 놀다가 출출해지면 그곳에 들락거렸는데, 흙 강아지 된 손을 엉덩이에 쓱쓱 비비고는 어렝이  위 볏짚 속으로 손을 쑥 넣는다.  따뜻한 달걀이 잡힌다. 송곳니로 양쪽을 톡톡 깨서 쭉 빨아 마시면 구수한 노른자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그러면 닭들은 까만 눈을 때록때록 굴리면서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서노를 쳐다본다. 저 원수 또 왔다고... 그래도 가끔은 개구리를 여러 마리 잡아다가 닭장에 넣어주는 답례를 하기도 했다.


닭들에게 서노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자기네 후손을 수시로 훔쳐먹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닭들에게는 엄청난 나쁜 짓'을 해도

"내 저럴 줄 알았어. 원래부터 나쁜 놈이었으니까!"

하고 달관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나쁜 짓이란 바로 식자우환적 표현으로  생사여탈권의 행사이다. 늘 아침마다 모이를 주는 '착한 사람'은 그의 할머니이고, 그 착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칼을 들고 그들의 목을 땄다면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엄청난 배신감과 원통함 속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서노 몫이었기 때문에 '나쁜 놈'이 또 '더 나쁜 짓'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닭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또 덜 원통해하며 요단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즉 할머니가 닭백숙을 해주실 때 닭을 잡는 일은 서노 몫이라는 것이다. 닭을 잡는 방식을 '수체분리법(首体分離法)'이라고 하는데, 그건 그저 큰 부엌 칼로 목과 몸을 뎅강 잘라서 나눠 놓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그런데 모양이 좀 사납다. 언젠가 서노가 장날, 시내 닭집에서 주인이 닭을 잡을 때 작고 날카로운 주머니칼로 아주 간단하게 목 아래 급소 찌르는 것을 봤다.  닭이 된서리 맞은 배추처럼 팩 쓰러졌다.

 


그래서 똑같이 따라서 한 뒤에 양은 대야로 지질러 놓았는데 한참 지나서 보니 그 장닭은 대나무 숲을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었다. 결국 도로  잡아다가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방식인 수체분리법을 다시 시행했다. 그랬더니 장닭은 몸통만 펄펄 뛰면서

" 야 이놈아! 내 대가리 내놔라 "

하며 난리 지랄을 쳤다.  


서노는 생각했다. 닭을 잡는 데 있어서 집행은 아주 흉악하고, 또 대가리 없는 닭이 피범벅으로 잠시 깽판을 부리기는 하지만, 용어는 교양 있어 보이는 수체분리법이라는  전통방식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